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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카나리아제도





극빈에서 벗어나려 광부와 간호사 등으로 독일을 향하던 1960~70년대. 우리 젊은이들이 택한 또 하나의 길이 원양어선을 타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 선원의 거점이 된 곳이 아프리카 북서부 카나리아제도의 라스팔마스였다. 대서양 이역만리 작은 섬에서 모은 외화는 우리 경제 발전의 소중한 디딤돌이 됐고 훗날에도 이곳은 원양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7개의 큰 섬으로 이뤄진 카나리아제도의 이름은 ‘개들의 섬’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인슐라 카나리아’에서 유래했다. 섬에 프레사 카나리오라는 사납고 큰 종류의 개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카나리아는 스페인령이지만 본토에서 1,400㎞ 이상 떨어져 있고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108㎞에 불과하다. 중세기부터 서유럽 항해사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1404년 프랑스 출신 탐험가인 장 드 베탕쿠르가 정복에 나서 교황의 인정을 받아 카나리아 왕국의 왕에 즉위했다.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조카는 섬을 포르투갈에 팔아넘긴다. 하지만 카스티야 거주민들이 반발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쟁이 벌어졌고 1479년 알카코바스 조약으로 스페인 땅이 됐다.

카나리아는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대항해 시대 이후 지리적 요충지가 됐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기착 항로로 이곳을 이용했다.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의 깃발을 들어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곳이다. 카나리아는 최고의 휴양지이기도 하다. 연평균 기온이 20도가량으로 추위에 지친 유럽인에게 인기가 높다. 연간 관광객이 1,200만 명에 달하며 관광산업은 카나리아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한다. 위기의 징조를 알리는 ‘광산 속 카나리아 새’의 근원이 이곳이다. 카나리아제도가 원산지로 여기에서 유럽 등으로 퍼져 나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이후 카나리아가 아프리카 이주민의 폭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아프리카 경제가 전염병으로 더욱 멍들자 유럽으로 탈출을 꿈꾸며 이곳을 향하는 것이다. 올해에만 1만 8,000여 명이 밀려들어 2,000여 명이 노숙할 정도다. 코로나19가 빨리 사라져 카나리아가 관광 낙원으로 되살아나길 바란다.

/김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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