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중앙은행의 가장 큰 책무이자 역할은 물가 안정이다. 한국은행법 1조 1항은 한국은행은 ‘효율적인 통화 신용 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해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책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금융시장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을 체감한 후 거의 모든 중앙은행이 금융 안정을 새로운 책무로 집어넣었고 한은도 2011년 한은법 개정을 통해 1조 2항에 금융 안정이라는 목표를 명시적으로 넣었다.
최근 국회가 한은에 고용 안정 책무를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은법 개정안을 논의하고 있다. 예전에도 고용 안정 책무를 추가하는 것에 관한 법안이 발의된 적이 있었지만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심각해진 고용 상황에 한은이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에 대한 여야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통과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경제 상황은 저물가와 저성장이 대변하는 뉴노멀 시대이다. 물가보다는 성장이나 고용에 중점을 둔 통화정책이 필요하고 특히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통화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은에 고용 안정이라는 책무를 명시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실익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러 한은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한은은 통화정책 수립 시 암묵적으로 고용이나 성장을 고려해 통화정책을 펼치고 있다. 늘어난 책무로 한은의 위상이 더 높아질 수는 있지만 고용 안정을 명시적으로 책무에 넣고 말고는 실질적인 통화정책 결정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책 수단의 부재다. 물가와 금융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도 정책 수단이 이자율 하나인 한은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가는 낮은데 자산 가격이 너무 높은 경우 이자율을 낮추면 물가를 올릴 수 있으나 자산 시장 버블을 일으키고 부채를 증가시켜 금융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더욱이 이자율이 0에 근접한 지금 상황에서 이자율 정책은 한계를 맞고 있다. 소위 말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통해 한은이 금융시장이나 실물경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성이 늘고 있고 일부는 이미 시행되고 있다. 무제한 금융 중개 지원 대출 확대, 산업은행을 통한 특별목적회사(SPV)에 한은이 8조 원을 투자해 저신용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매입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것도 금융 안정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다.
고용 안정을 포함한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어떨까. 고용 안정은 금융 안정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우리나라 고용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다. 노동자와 사용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용 관련 법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와 비노조 간 이해관계가 얽힌 시장, 게다가 이번 정부 들어 더욱 경직된 노동시장에서 한은이 무슨 수로 고용을 늘릴 수 있을까. 경직된 노동시장에서의 관련 통계는 실물경제를 제대로 대변하거나 즉각 반영하지 못하고 정책 수립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더욱이 늘어난 책무에 비해 한은이 갖고 있는 정책 수단이나 정보는 한계가 있다.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도 없고 고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도 없다.
고용 안정이라는 책무를 부과해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수단을 정부가 꼭 쥐고 있다면 한은법 개정은 독배가 될지도 모른다. 정부가 왜곡되고 단편적인 고용 통계를 들고나와 한은에 이런저런 압력을 가할 수 있고 고용을 핑계로 경쟁력 없는 회사에 직간접적으로 자금 수혈을 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늘어난 재정 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국채를 한은이 다 떠안게 할 수도 있다. 고용 상황이 어려운 것을 한은에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고용 안정이 명시적인 책무로 들어올 경우 이와 같은 정치권이나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고용 안정의 중요성만큼 한은이 이를 명시적인 책무로 받을 경우 이에 상응한 정책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이때야말로 정치권에 흔들리지 않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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