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5월 8일, 레바논 베이루트 인근의 파나르 마을에 전국에서 300명의 요리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만든 것은 엄청난 양의 ‘후무스’다. 병아리콩을 으깨어 만드는 후무스는 우리나라의 김치처럼 중동 지역에서는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이날 레바논 요리사들은 1만 450㎏에 달하는 후무스로 4개월 전 이스라엘이 세운 기네스북 세계기록을 갈아치웠다.
한낱 재밋거리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 도전은 문화적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일종의 ‘전쟁’이었다. 적어도 수백 년 전부터 중동의 식문화를 대표해온 후무스를 두고 뒤늦게 이 지역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이 느닷없이 성경에도 등장하는 유대인의 음식이었다는 주장을 펴며 ‘후무스를 훔쳤다’는 것이 아랍권의 주장이다. 특히 레바논은 2008년 국제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급기야 기네스북 기록으로 자존심 대결에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후무스 전쟁’은 2009년부터 양국이 엎치락뒤치락 신기록을 갈아치운 끝에 숨 고르기에 들어갔지만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불현듯 이 후무스 전쟁이 떠오른 것은 최근 불거진 김치 논란 때문이다. 쓰촨성의 절임 채소 ‘파오차이’가 국제 표준 인증을 받자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는 중국의 김치가 세계 표준으로 지정됐다고 보도해 국내 여론의 공분을 샀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는 한중 간 설전이 벌어졌다. 국제표준화기구(ISO)가 “파오차이 표준에 김치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중국 포털 바이두에는 여전히 “김치는 중국의 문화유산이며 중국이 기원”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중국 네티즌들은 “김치라는 발음도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마저 제기한다.
한국의 것을 ‘중국산’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요즘 들어 부쩍 잦아졌다. 중국 게임 속 한복이 명나라 전통 의상 한푸(漢服)라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중국 사극에서는 시녀들이 한복을 입고 등장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되는 한국의 창작 동요 ‘반달’은 TV 프로그램에서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 민요로 소개됐다. 같은 논리로 ‘아리랑’은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쯤 되면 ‘문화 동북공정’이다. 동북공정이란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귀속시키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다. 고조선과 고구려·발해가 고대 중국의 지방정부였다는 황당한 역사 왜곡의 실체다. 이 프로젝트는 형식적으로 2007년에 종료됐지만 중국 사회에 뿌리내린 동북공정 논리는 역사·문화 왜곡의 형태로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6·25 전쟁을 한국과 미국이 함께 겪은 “고난의 역사”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중국이 노골적인 BTS 때리기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집요하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는 중국 앞에 우리의 대응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 왜곡 대응을 위해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자리가 공석이라는 사실이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온라인상에서 제기되는 논란을 정부가 나서서 이슈화하거나 외교적 분란으로 키워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련의 문화 왜곡이 중국 정부 차원의 조작이 아니라고, 한류 열풍을 시샘하는 소수의 중국 애국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길 일도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더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문화 왜곡에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한다. 논란이 생길 때마다 일회성 항의나 반박자료 배포로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역사와 문화의 고유성을 입증할 근거와 논리를 확립하고 이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정부는 물론 온 국민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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