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위헌 논란을 빚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을 끝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174석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를 막을 수단이 없는 국민의힘은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으로 법안 처리 저지를 시도하며 대국민 호소에 나섰다.
민주당은 장외투쟁, 의원직 총사퇴 카드까지 검토한 제1 야당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수처법 개정안을 10일 열리는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대한민국이 독재국가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의결 후 의사국을 거쳐 본회의에 부의된 130개 법안 가운데 공수처장 임명 시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공수처법 개정안을 비롯해 남북관계발전법·국가정보원법 개정안 등 총 3개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앞서 민주당은 이들 법안의 본회의 부의를 위해 8~9일 소관 상임위와 법사위 전체 회의를 잇따라 개최하며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은 본회의 의사 진행 발언을 통해 “역사는 윤호중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의 법치 파괴를 기억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필리버스터 토론자로 나서 “거대 여당과 청와대가 합작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짓밟았다”며 “집권자는 법치주의를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닌 법을 이용한 지배로 생각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공수처는 누가 뭐래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한, 문 대통령을 위한 비리 은폐처’”라며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수시로 무시하며 꼼수와 편법으로 국민 무시, 야당 패싱, 입법 폭주를 상습적으로 자행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리버스터는 정기국회 회기 종료일인 9일 자정 종료됐다. 민주당은 공수처법 개정안이 자동으로 본회의에 상정되는 새 임시국회 시작일인 10일 표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법에 따르면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법안은 다음 회기 첫 본회의에 지체 없이 표결에 부쳐진다. 한번 필리버스터를 한 법은 다시 필리버스터를 할 수 없다.
━ 거센 항의에도 공수처 강행...野 “절대권력은 부패한다” |
“자랑스러운 국회의 역사와 전통이 지금 송두리째 무너지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국회는 거수기도, (청와대의) 통법부도, 자동판매기도 아닙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합니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9일 오후 9시께 국회 본회의장 발언대에 올라 21대 국회 첫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서 토해낸 말이다. 그의 필리버스터는 여당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단독으로 심사하고 의결해 이날 본회의에 부의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의 표결을 멈춰 세웠다.
김 의원은 이어 “불법과 부정이 합법으로, 정의로 가장하고 있다”면서 “여러분이 정말 국민을 위한 국회의원인지 청와대의 지시를 받는 국회의원인지 궁금하다”며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목했다.
여당의 공수처법 강행 처리 계획은 이날 야당이 필리버스터로 맞서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면 해당 법안은 국회 회기가 종료되거나 24시간(종결 동의 제출·가결 시)이 지난 뒤 표결해야 한다.
이날 국회는 본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분노와 혼란의 기류가 흘렀다. 국민의힘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비상 의원총회를 열고 공수처법과 국정원법 개정안 등에 대한 투쟁 의지를 다졌다. 주호영 원내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면담 요구를 했다”며 “문 대통령은 늘 협치와 상생을 말했는데 야당 원내 대표가 요구하는 면담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본회의가 예정된 오후 2시께에 본회의장에 재집결해 ‘권력 비리 방탄, 공수처 저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초선인 최승재 의원이 앞장서 갈라진 목소리로 “이런다고 감춰지나, 정권비리 밝혀내자”고 선창하자 다른 의원들도 따라서 구호를 외쳤다. 초선 의원들이 국회 앞 농성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 국민의힘 중진 의원 10여 명은 ‘민주주의 유린, 공수처법 저지’ 피켓을 들고 박병석 국회의장실을 항의 방문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박 의장은 오후 2시에 정해진 본회의를 2시 45분으로 미뤘다. 본회의는 더 지연돼 3시께 개최됐다. 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입장하자 국민의힘 의원들도 피켓을 손에 든 채 본회의장으로 진입했다. 조수진 의원은 민주당을 향해 “이게 민주당입니까”라며 공수처법의 일방 처리를 비판했다.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야당의 야유에도 단상에 올라 공수처법에 대한 발언에 나서 필요성을 호소했다. 그는 “공수처의 수사 대상은 고위 공직자 등 7,000여 명에 불과하다”며 “공수처는 추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의 분산”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김종민 의원의 발언에 야유를 쏟아내면서 국회 본회의장은 험악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국민의힘이 공수처법에 대한 필리버스터에 돌입하면서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는 다음 임시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국회법상 필리버스터는 정기국회 또는 임시회의 회기가 종료되거나 의원 종결 동의서(재적 의원 3분의 1 이상)가 의장에게 제출된 뒤 24시간 후에 무기명투표를 통해 의결(5분의 3 이상 찬성)되기 때문이다. 김기현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이날 자정까지 진행되면서 공수처법은 다음 임시회인 10일 표결을 진행할 수 있다.
이날 야당이 필리버스터로 표결을 막은 공수처법은 전날 법사위에서 여당이 단독 의결한 김용민 의원 안이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 시 ‘추천 위원 7명 중 6명 이상 찬성’ 기준을 ‘의결정족수의 3분의 2 이상’으로 완화하고 공수처 검사 자격 요건을 현행 변호사 10년에서 7년으로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법이 통과되면 공수처장은 야당 추천위원(2명)이 반대해도 여당이 지명한 후보추천위원(2인)과 대한변협회장, 추미애 법무부 장관, 법원행정처장 등 5인이 찬성하면 최종 후보 추천이 가능해진다. 공수처법 개정안 등은 법안 마련과 심사, 상정, 안건 조정, 법안 통과 등 법안 심사와 의결을 위한 모든 과정이 여당 단독으로 처리되는 전례 없는 상황이 기록된다. /임지훈·구경우·김혜린기자 bluesquar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