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수정 추기경 등 한국 천주교 주교단 전원이 지난 9일 사형제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이하 사폐소위)는 이날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27명의 현직 주교단 전원이 서명한 ‘사형제도 위헌 결정 호소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주교단은 의견서에서 “사형제도가 강력범죄 억제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헌법재판관님들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며 “그럼에도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치와 사형집행 재개 주장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력범죄를 막기 위해 우리 사회는 더욱더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극단적인 형벌이 그 대안이 될 수는 결코 없다”며 “오히려 사형제도 폐지야말로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는 훌륭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교단은 “부디 대한민국이 인권 선진국의 큰 걸음을 내딛고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의 사형제도 폐지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헌법재판소에서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며 “조속한 사형제도 위헌 결정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고 바랐다.
주교단은 의견서 하단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사형폐지총회’에 보낸 영상 메시지 중 일부를 발췌해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메시지에서 “아무리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존엄성은 상실되지 않는다”며 “그 누구도 고통받고 상처 입은 공동체를 다시 포용할 기회를 박탈당한다거나 죽임을 당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형은 모든 사람의 생명권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사형제도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교황은 “각국 지도자들이 자국 내에서 사형제의 전면적인 폐지를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하도록 촉구한다”면서 “어떠한 생명도 죽이지 않고 모든 사회의 선을 얻을 수 있도록 각자의 존엄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라고 당부했다.
주교회의에 따르면 사폐소위는 2019년 2월 사형제도를 규정한 형법 제41조 제1호 등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바 있다. 앞서 사폐소위는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된 A씨를 지원하기로 하고, 사폐소위 총무 김형태 변호사가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과 헌법소원 청구를 대리하도록 했다.
지난 2018년 2월 인천지법 부천지원은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위헌 제청 신청을 기각했고, 이에 A씨는 헌법소원 청구를 했다. 지난 2년간 헌법소원 심리는 없었으나 국제사회가 먼저 사폐소위의 호소에 응답했다고 주교회의 측은 전했다. 2019년 12월 국제앰네스티에 이어 올해 7월 국제사형제반대위원회가 헌법재판소에 사형제도 폐지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냈다.
에이먼 길모어(Eamon Gilmore) 유럽연합(EU) 인권 특별대표도 지난 2월 사폐소위를 통해 한국의 사형제도 폐지를 지지하는 EU 공식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EU가 한국 헌법재판소에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공식 의견서를 낸 것은 처음이라고 주교회의 측은 전했다.
EU 모든 회원국은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거나 한국처럼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사실상 사형폐지국은 142개국에 이른다. 주교회의는 “이제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폐지를 넘어서서 법률적 폐지로 나가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촉구했다.
/지웅배 인턴기자 sedati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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