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무대에서 올해까지 3년 연속 드라이버 샷 거리 1위에 오른 여자 골퍼 김아림(25·SBI저축은행)은 장타 말고도 트레이드마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배꼽 인사’다. 그는 샷이나 퍼트 뒤에 꼭 갤러리 쪽을 향해 한 손을 배꼽 위치에 대고 깍듯이 인사한다. 보통 선수들처럼 모자챙을 잡고 눈인사만 해도 될 텐데 김아림은 “워낙 오래전부터 몸에 익어서 안 하면 더 어색하다”고 말한다.
세계 랭킹 1위 고진영, 국내 투어 상금왕 김효주와 1995년생 동갑인 김아림은 그들보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데뷔가 2~3년이나 늦었다. 175㎝의 큰 키로 마음먹으면 드라이버로 300야드도 너끈히 보내지만 세밀함이 부족해 2부 투어에 3년간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그는 1부 투어 선수라는 지금의 신분 자체를 감사해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올해 김아림에게서 배꼽 인사를 뺏어 갔다. 무관중 경기에 인사할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최고 메이저 대회인 US 여자 오픈 출전권이 주어졌다. 코로나19 여파로 지역 예선을 취소한 미국골프협회가 출전 자격을 확대하면서 세계 랭킹 94위였던 김아림에게도 첫 출전이라는 행운의 기회가 온 것이다.
국내에서는 대기만성으로 불리는 김아림이지만 미국 최고 대회 정복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김아림은 15일(한국 시간) 미국 휴스턴에서 끝난 제75회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 상금 100만 달러(약 10억 9,000만 원)를 손에 넣었다. 해외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대회는 생애 처음 출전이었는데 5타 차 대역전 우승 기록을 썼다.
김아림의 최고 권위 메이저 제패는 깜짝 우승이면서 동시에 깜짝 우승이 아니다. KLPGA 투어에서 2018·2019시즌에 1승씩을 거둔 그는 2020시즌은 우승 없이 5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2018시즌 6위였던 상금 순위가 21위까지 내려갔다. 더구나 미국은 겨울 훈련으로만 찾는 곳이었다. 김아림은 그러나 막판 흐름이 괜찮았다. 10~11월 국내 4개 대회에서 모두 톱10에 든 것.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은 상태로 미국으로 건너간 김아림은 첫날 1타 차 공동 2위에 오른 뒤 2·3라운드 숨 고르기를 거쳐 마지막 날 폭발적인 추격전 끝에 짜릿한 뒤집기에 성공했다. 국내 2승 포함, 3승이 모두 역전 우승이다.
김아림의 스윙 코치인 김기환 씨는 “올 시즌 전반기에 부진이 길어지자 휴식기에도 오전 5시 30분부터 12시간 이상을 연습에 매달리더라”며 “골프에 대한 열정 자체가 남다른 선수다. 강약 조절에 눈을 뜨면서 자신만의 확실한 전략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김아림은 이날 티샷 때 드라이버를 고집하는 대신 3번 우드와 유틸리티 클럽 등을 유연하게 사용하며 우승을 빚어냈다. 이번 대회 평균 드라이브 255.8야드로 전체 4위에 오른 그는 길고 어려운 코스에서 버디 16개를 떨어뜨려 이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단 4명만 언더파 스코어로 마치는 힘겨운 경쟁에서 김아림은 대회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승리했다. 코로나19 사태 속 대회에 딱 어울리는 챔피언의 모습이었다”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를 썼다’는 김아림의 말을 소개했다. 김아림은 “이 시국에 이렇게 경기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내 플레이가 누군가에게 희망과 에너지가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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