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5년 영국 런던. 2주를 끌어온 정권 실세들의 화이트홀 회의가 끝났다. 회의의 결론은 유대인에 대한 재입국 허용. 교회와 의회·군대·상인들을 각각 대표하던 참석자들의 견해가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자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이 단안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듬해부터 하나둘 들어왔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의 추방령 이후 365년 만에 영국에 돌아온 유대인은 두고두고 세계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가 단위로는 최초로 유대인을 내쫓았던 영국이 재정착을 허용한 이유는 추방의 이유와 같다. 돈. 국부를 너무 빨아들이는 유대인을 견제하려 쫓았으나 수백 년 세월이 흐른 뒤 돈이 궁해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왕당파와의 내전부터 시작해 연이은 스코틀랜드·네덜란드와의 전쟁에 끝없이 비용이 들어가며 돈줄이 말랐다. 사정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네덜란드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상권 다툼으로 고사 위기에 몰렸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당초 스웨덴을 피신 지역으로 골랐다가 방향을 영국으로 틀었다. 청교도들이 유대인에게 동정적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영어 성서가 퍼지며 유대교와 종교적 뿌리가 같다고 인식하는 청교도가 늘어나며 동정 여론이 퍼졌다.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이 특사로 파견한 랍비 메나세는 크롬웰과 물밑 교섭을 펼쳤다. 영국 안에서 위장 개종해 숨죽이고 살아가던 유대인들도 스스로 정체를 밝히고 나섰다.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크롬웰마저 공식 발표나 법제화를 꺼린 채 소리소문없이 불러온 유대인들은 왕정복고 같은 정치적 변혁에서도 살아남았다. 크롬웰과 명예혁명 초기에 영국에 되돌아온 유대인은 약 2,100여 명. 얼마 안 지나 옛 유대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 ‘더 시티(the City)’까지 물려받았다. 오늘날까지 세계 금융의 중심축으로 작동한 런던 금융가의 기틀이 이렇게 다져졌다.
되돌아온 영국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자코바이트 반란에 공을 세워 유대인 귀화법(1745년)이 제정되고 마침 계몽주의와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던 동유럽에서 더 많은 유대인이 영국에 흘러들었다. 19세기 세계 금융계를 쥐락펴락하던 로스차일드 가문도 그들 중 하나다. 하원의원과 런던시장은 물론 영국 유대인들은 총리직까지 꿰찼다. 영국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싸워주면 독립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버린 데에도 유대계 영국인들의 입김이 서려 있다. 이스라엘 국가 성립(1947년)도 마찬가지다. 영국 유대인의 역사는 중동의 긴장과 갈등을 읽는 핵심 열쇠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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