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베리의 눈물’로 기억된 5년 전 브리티시 여자오픈은 고진영(25)의 골프 인생에 있어 터닝 포인트였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비회원 신분으로 나간 당시 메이저 대회에서 고진영은 마지막 날 16번 홀(파4) 더블 보기 탓에 박인비에게 우승을 내줬다. 통한의 눈물이 터졌지만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경험한 이 준우승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약이었다.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돌아온 뒤부터 고진영은 진화를 거듭하며 1인자로 올라섰다. 이듬해 한국 투어에서 대상(MVP) 포인트 1위에 올라 박성현의 전관왕을 저지하더니 2017년에는 국내에서 열린 LPGA 투어 대회에서 우승해 미국 진출권을 따냈다. 2018년 LPGA 투어 신인상에 이어 지난해 메이저 2승 등으로 올해의 선수, 최소타 수상, 상금 1위를 싹쓸이한 고진영은 올해도 상금 1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LPGA 투어에서 2년 연속 상금 1위는 7년 만에 나온 진기록이다. 이전 기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박인비다.
고진영은 21일(한국 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티뷰론 골프 클럽(파72)에서 열린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을 18언더파 270타의 5타 차 완승으로 마무리한 뒤 “미국 투어에 복귀할 때만 해도 이 대회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미국 내 심각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걱정한 고진영은 지난달에야 투어에 합류해 이번까지 4개 대회만 치렀다. 지난주 US 여자오픈에서 3위 안에 들어야만 시즌 포인트 상위 70명만 나갈 수 있는 투어 챔피언십 출전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고진영은 마지막 홀에서 10m가 넘는 먼 거리 버디 퍼트를 넣어 공동 2위로 마치면서 기적적으로 출전권을 얻었다. 크리스천인 고진영은 “지난주에 말도 안 되게 상위권으로 마무리해 그 기회로 여기 나왔다. 그렇게 나오게 된 대회에서 우승까지 하니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신기해했다.
올 시즌 최대 우승 상금인 110만 달러와 지난주 준우승 상금을 더해 1주일 사이에 17억 원이 넘는 돈을 번 고진영은 시즌 상금 166만 7,925달러(약 18억 3,000만 원)를 기록했다. 최종전 우승에 상금 13위에서 1위로 솟구친 것이다. 4년 만의 투어 기록인 72홀 노 보기 우승, 114홀 연속 노 보기 등 지난해 이룬 게 워낙 많아 코로나19 변수까지 낀 올해는 쉬어 가는 시즌으로 봤는데 고진영은 1년 4개월 만의 통산 7승이자 시즌 첫 승에 더없이 화려한 장식을 수놓았다.
김세영에게 1타 뒤진 2위로 4라운드를 출발한 고진영은 10번 홀까지 김세영과 13언더파 공동 1위로 맞섰다. 11번 홀(파4)이 승부처였다. 김세영이 티샷을 오른쪽으로 잘못 쳐 보기를 범한 반면 고진영은 보기 위기에서 4m 파 퍼트를 넣어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12번 홀(파3) 2m 버디로 2타 차로 달아나는 등 고진영은 막판 7개 홀에서 버디만 5개를 몰아치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내가 쳤지만 내가 했나 싶을 정도로 플레이가 잘됐다”는 후반 9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100야드 안쪽 샷이었다. 고진영은 80~100야드 거리의 샷은 마치 연습하듯 여유롭게 핀 한두 발짝 거리에 붙여 버디를 챙겼다. 밥 먹듯 습관이 된 연습의 결과다. 고진영의 스윙 코치 최형규 씨는 “평소 라운드를 하면 고진영은 꼭 80~100야드 거리에 공 10개를 던져 놓고 연습하는데 핀과의 거리가 평균 2.5m를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샷이 정확하다”며 “열 번을 치면 보통 선수들은 버디가 3~4개 나오는데 고진영은 7~8개를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대회장 드라이빙 레인지에서도 고진영은 100야드 지점에 서 있는 캐디의 발 앞에 공을 떨어뜨리는 연습을 한다. 캐디가 좌우 상하로 5야드씩 이동할 때마다 그 지점에 떨어뜨려야 연습은 끝난다.
지난해까지 2년 연속 그린 적중률 1위에 오를 만큼 투어 최고의 아이언 샷을 가졌으면서도 고진영은 만족을 모른다. 지난 6월 새 코치인 최 씨를 찾아가 어드레스부터 손을 봤다. 흐름이 좋지 않을 때 간혹 나오는 실수조차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발바닥에 실리는 무게 배분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부터 시작해 석 달간 스윙 전반을 다듬고 다음 두 달은 코스 매니지먼트 훈련에 매달렸다. 5개월간의 집중 훈련 동안 틈틈이 나간 국내 투어 6개 대회는 좋은 리허설이 됐다. 그 결과 고진영은 이날 18개 그린 중 17개를 적중하는 등 나흘간 81.9%(59/72)의 그린 적중률을 자랑했다.
지난해 7월부터 세계 랭킹 1위를 지키다 최근 턱밑까지 추격당했던 고진영은 준우승-우승 피날레로 격차를 벌리며 새해를 세계 1위로 맞게 됐다. 곧 귀국해 자가 격리를 마치면 다음 달 말부터 새 시즌 준비에 들어간다.
세계 2위 김세영은 15번 홀(파4)에서 티샷이 또 오른쪽으로 빗나간 끝에 보기를 적어 4타 차로 멀어지면서 추격이 힘들어졌다. 13언더파 공동 2위로 대회 2연패에는 실패했지만 김세영은 생애 처음 올해의 선수로 우뚝 섰다. 상금, 올해의 선수 1위였던 박인비는 2언더파 공동 35위로 밀려 상금 3위, 올해의 선수 포인트 2위로 마감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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