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년 1월 5일 새벽, 프랑스가 얼어붙었다. 기온이 갑자기 -10℃로 떨어진 것. 평년에 영상권이던 수은주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보름 후에는 -20℃까지 내려갔다. 파리의 기온은 19일 연속 -10℃ 이하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군인, 외교관을 지낸 생시몽 공작(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 백작의 친척)은 ‘회상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얼마나 추웠는지 베르사유궁전의 유리잔이며 향수, 술병들이 모두 깨졌다.’
하층민들의 삶은 더 고달팠다. 겨울 작물과 남부의 올리브 나무까지 얼어 죽어 심각한 기근 사태가 닥쳤다. 식량을 요구하는 폭동도 연이어 터졌다. 2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155번의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식량 부족은 영양실조를 초래했고 아사자 뿐 아니라 병사자도 속출했다. 여름에는 전염병까지 퍼졌다. 1709년 프랑스에서만 60여만 명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기근으로 출산도 20만 명이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에 처음 몰아닥친 혹한은 유럽을 휩쓸었다. 독일과 영국의 기온도 뚝 떨어지며 수많은 동사자가 나왔다. 상업 활동이 위축되고 북유럽의 발틱해까지 얼어붙는 통에 무역도 급감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가수 겸 배우 알 스튜어트는 1996년 발표한 앨범 ‘기억 속 가장 추웠던 겨울’에서 ‘1709년 겨울은 정말 추웠지. 해안가와 함정들이 모두 얼어붙고…(중략)…교회 종소리마저 끊겼어’라고 읊었다.
교회 종은 울릴 수 없었다. 타종하려다 깨졌으니까. 조선도 참혹한 겨울을 보냈다. 숙종실록 47권(숙종 35년·1709년)에 따르면 겨울 이상 기온으로 기근과 질병이 만연했다. 조선은 19세기 내내 기근에 시달렸다. 세계적인 강추위의 원인은 무엇일까. 태양 흑점 활동이 감소한데다 1707년 일본 후지산, 이탈리아 베수비오산 등 4개 대형화산의 동시적 폭발로 화산재가 햇빛을 가리고 대기 온도를 떨어뜨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기후변동은 지구촌의 역사를 바꿨다. 혹한과 기근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프랑스는 국고를 소진하고 끝내 대혁명까지 겪었다. 312년 전 겨울은 옛날 얘기에 머물지 않는다. 각국은 1709년 이래 최저 성장을 우려하고 있다. 인간은 기후에 매인 미미한 존재일 뿐일까. 영국을 보자. 추위로 땔감이 더욱 부족해진 상황에서 코크스 공법을 개발하며 양질의 철강 생산을 시작한 게 바로 1709년이다. 한파를 꼼꼼히 기록하고 분석했던 독일도 대혹한 이후 성장 가도를 달렸다. 역사의 주도권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사회의 몫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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