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얼어붙었다. 지난 2019년 한국 법원의 일제 강제 징용 판결, 일본의 보복성 한국 수출 규제, 한일 지소미아(GSOMIA) 조건부 연장 등 대형 이슈가 연달아 터지면서 양국 갈등의 골은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됐다. 정부는 물론 학계, 정계, 재계까지 너나 할 것 없이 해결책 마련에 나섰지만 2021년 현재까지도 개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확산하는 현실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 간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만 여전히 일본에서는 혐한(嫌韓), 한국에서는 ‘노 재팬(NO JAPAN)’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양국 갈등. 도대체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 일본의 식민 횡포와 반성 없는 자세, 현재 양국 지도자의 정치·외교력 부족 때문만일까. 많은 이가 갈증을 느끼는 한일 관계의 궁금증에 대해 일본 전문가인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명예 연구위원이 30년 넘는 일본 연구와 현지 경험을 토대로 나름의 답을 정리해 책을 내놓았다.
저자가 말하는 양국 갈등의 원인은 ‘한일역전’이라는 제목 네 글자로 요약 된다. 이미 많은 한일 전문가와 언론이 ‘한국의 일본 앞지르기 본격화’를 오늘날 갈등이 발생한 지점이라고 지목했지만, 저자는 일본 현지의 목소리와 정확한 통계 지표 등을 취합·정리해 한일역전의 확실한 근거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감성적이고 논리가 부족한 ‘국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팩트’를 내세운다. 반일(反日)이든, 숭일(崇日)이든 1876년 강화도 조약 강제 체결 이래 한국인에게 헤아릴 수 없는 상흔과 한을 남긴 일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이제 조금 더 냉철하게 따져보자는 게 저자의 제안이다.
저자는 “일본이 한국에 추월당했다”고 전제하면서 그 원인과 증거를 3부로 나눠 설명한다. 1부에서는 일본의 정치·사회·문화적 후진성의 배경을 살폈다.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 등을 소개하면서 혐한은 2차 세계대전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종전(終戰)'이라 믿고 살아온 일본인의 세계관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종속됐음에도 미국의 파트너라고 자체 규정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을 하대해 왔지만, 아시아의 성장으로 이런 일본의 대외 인식이 삐걱대기 시작했고 특히 한국이 여러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자 일본 국민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혐한’으로 발화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숭고한 일본인 사관’도 문제다. 일본인은 숭고하고 아름다워 약탈·강간·차별 및 그 밖의 부도덕한 행위를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일절 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관이 터무니 없는 애국 논리, 혐한 합리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2부에서는 코로나 19 방역 실패를 들어 일본 사회의 오래된 문제점을 파헤쳤다. 이달 들어 일본 정부가 다시 긴급사태를 추가 발령하는 등 코로나 사태를 맞아 우왕좌왕하는 모습에서 ‘일본이 저것 밖에 안 되나’ 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본 행정 시스템의 비효율, 칸막이 조직 문화,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일본인 기질 등이 화를 키웠다”며 “신용카드, 인터넷 뱅킹, ATM 등을 잘 쓰지 않고 아직도 이메일 대신 팩스를 쓰는 디지털 지연 현상과 도장 문화 등도 문제”라고 꼬집는다. 이런 부분에서는 한국이 이미 일본을 크게 앞서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3부에서는 양국의 경제 지표를 비교한다. 일본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의 분석 등과 함께 여러 지표 면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 현상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GDP는 2017년부터 일본에 앞서 있다. 노동 생산성 역시 일본을 역전했다.
일본의 자부심이었던 기업 경쟁력도 약화하고 있다다. 저자는 “1989년에만 해도 세계 기업 시가총액 상위 20사 중 14사가 일본 기업이었으나 세계 상위 기업 20사 목록에서 일본 기업은 자취를 감췄다”며 “일본을 이끄는 기업들은 죄다 ‘늙은 기업’ 뿐”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이 진주만 습격 식으로 자행했던 한국 수출 규제가 역효과를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 기업이 더 이상 비교 우위를 갖지 않는 상황에서 꺼내든 보복 카드는 오히려 일본 기업에 더 많은 타격을 줬다.
물론 일본은 여전히 강대국 대열에 서 있다. 한국에 추월 당한 지점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앞선 분야도 많다. 일본 내부에서도 자성과 미래 지향적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책을 낸 까닭은 아직도 ‘숭일’에 빠져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인이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2만2,000원.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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