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같이 술에 관대한 나라에서는 ‘심신미약’ 주장이 법정에서 자주 나온다.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난 다음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일을 저질렀으니 감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술은 제정신으로 먹었지만 범죄는 제정신으로 저지르지 않았다는 주장은 각종 심신미약 범죄가 알려질 때마다 대중들의 분노를 산다.
A씨도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한 범죄자들 중 한 명이다. 그는 2019년 10월 동거 중이던 B씨가 이웃집 남성 C씨와 술을 마시자 남녀 관계로 지내는 것으로 의심해 범죄를 저질렀다. 범행 과정에서 A씨는 미리 준비한 야구방망이와 식칼을 사용했는데 결국 흉기에 찔린 C씨는 사망했고 B씨는 중태에 빠졌다.
문제는 사전에 준비한 도구를 사용해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A씨가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심신미약이 인정되려면 범행이 충동적으로 벌어져야 하는데 A씨는 자신의 집에서 야구방망이와 식칼을 ‘챙겨서’ 범행 장소로 이동했다. 음주 여부와 상관 없이 살인의 고의성이 확실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A씨가 심신미약을 주장한 것은 감형을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그는 범행 직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약간 취기가 올라온 정도였다”고 진술했고 범죄 경위를 상세히 기억했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술에 만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말을 바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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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A씨의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범행의 경위 및 그 전후에 이루어진 피고인의 행동과 이 사건 기록에 나타난 모든 정황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이 당시 술에 취하여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심신미약을 감경 요인으로 보지 않았고 A씨는 대법원 상고 끝에 최종 징역 20년형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법정에서 심신미약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감경 사유다. 특히 초범이고 범행에 대해 반성하고 있을 경우 재판부는 심신미약을 양형 사유에 반영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아동 성 범죄자 조두순이 과거 재판에서 술에 취한 점과 심신미약이 인정돼 징역 15년에서 12년으로 감경된 사실이 알려지는 등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면서 법원도 주취감경에 대해서는 점점 더 엄격해지는 추세다. 술에 관대한 한국의 문화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다.
/이경운기자 clou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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