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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여신들의 외모 경연, 결과는 파국이었다

■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진선미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불화의 여신 속수에 빠진 세 여신

매수·공모로 얼룩진 각축장 전개

부정개입 후과가 파리스 파멸불러

진선미는 서로 삼투·중첩된 가치

상황따라 하나가 두드러져 보일뿐

우열을 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굳이 최고의 가치 꼽아야 한다면

폐허에서도 미래 이끄는 사랑일것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황금사과'를 묘사한 그림. 파리스(맨 오른쪽)가 여신 아테네(왼쪽)와 헤라(왼쪽 두번째), 아프로디테(왼쪽 세번째)에게 사과를 보여주고 있다. /위키피디아




어느 미인 선발 대회에서는 지금도 1등에서 3등까지의 순위를 ‘진·선·미(眞善美)’로 부른다. 이 경연은 여성을 상품화한 것부터 시작해 문제가 많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명칭이다. 8등신 신체의 황금분할을 강조하는 미모 경연에서 1등을 미가 아닌 진이라 부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면의 아름다움 운운하면서 진과 선을 우위에 두는 태도가 도리어 기만과 위선으로 비친다. 그래도 돈이 지존의 가치로 당연시되는 시대에 이런 명실(名實)의 불일치를 통해서라도 진선미가 최고 가치였다는 것을 알린 점만큼은 일말의 공헌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스신화에 이와 유사한 경연 대회가 등장한다. 불화의 여신이 던져놓은 사과 때문에 세 여신 간의 다툼이 벌어진다.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고, 헤라·아테네 그리고 아프로디테가 엉겁결에 ‘미의 경연 대회’에 참여한다. 사실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승자가 될 것은 처음부터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권력과 부를 가진 헤라, 지혜와 명예를 관장하는 아테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간(신도 못 내린 판결을 떠맡은 파리스) 따위를 매수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당연히 선의의 공정한 경쟁이 아닌 매수와 공모로 얼룩진 각축장이 펼쳐진다. 잘 알려졌다시피 파리스는 지상 최고의 미인을 주기로 약속한 아프로디테를 선택한다. 그러나 불공정한(공정이 불가능한) 판결은 반드시 후과를 낳는 법. 파리스의 가족 및 공동체 전체가 파멸로 내몰린다.

진선미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와 같은 가치도 모두 소중하다. 어느 것 하나 폄훼하거나 소홀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속적 가치에 초연한 척하다가는 위선에 빠지기 쉽다. 반대로 진선미라는 막연하게 ‘없어 보이는’ 가치를 외면했다가는 종국에 세속적 가치들의 허망함만을 보게 된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만인이 눈독을 들이는 ‘있어 보이는’ 세속적 가치는 특정인의 영원한 소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기에 빗대면 유아 청년기는 미, 중장년은 선, 노년은 진에 부합한다. 순진무구한 시절은 아름다움에 친화적이고, 사회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하는 중장년에게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선이 중요해지고, 시간의 파고를 넘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노년은 진리가 어울린다. 미를 숭상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이웃 이집트에 비한다면 풋내기에 불과했다. 심미적인 예술 분야에서 신동의 등장은 비일비재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 분야에서는 극히 드물다.

프레드리히 실러




어떤 이는 진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그는 어리석은 자의 착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 근사한 껍데기가 알맹이를 감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다른 이는 선을 최고로 삼는다. 똑똑이만이 악랄한 지능범이 될 수 있으며, 미모로 선량한 이들을 등쳐 먹는 악한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미를 최고로 삼는 자는 지식과 선의로 무장하고 어떤 일을 도모했으나 속수무책 파탄에 이르는 것을 본 사람이다. 예컨대 프랑스혁명 당시 계몽주의로 무장하고 선의지를 가졌던 이들이 어떻게 실패하고 변절하는지를 본 사람,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실러 같은 사람이 그런 부류다. 참된 혁명은 머리와 심장만으로는 안 된다. 강제를 통한 어색한 몸짓이 아니라 춤추듯 ‘온몸’을 변화의 리듬에 실을 수 있는 심미적 인간만이 혁명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런 심미적 근본주의자는 희귀하다.

진선미의 우열을 가리려는 유치한 태도는 신화에서처럼 파괴만을 남긴다. 진선미는 실은 서로 삼투·교차·중첩된 가치들이다. 시간과 상황 속에서 어느 하나가 두드러질 뿐 숨겨진 가치들이 그 하나를 떠받들고 있다. 그래서 우열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굳이 최고의 가치를 정해야 한다면 나는 이런 가치들을 낳고 키우는 ‘사랑’을 꼽고 싶다.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으로도 불린다. 사랑으로 그 여신을 해석한다면 이 경우도 아프로디테의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다. 가치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았다. 새롭게 다가온 영화의 메시지는 이렇다. 잔혹한 세상에 던져진 아이에게 아름다움이라는 환상의 방어벽은 꼭 필요하다. 기성세대는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미의 가치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미래가 있어야만 진과 선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의 궁극적 가치는 진과 선이 무력화된 상황에서도 미래 세대에게 희망(아름다운 꿈)을 선사하는 사랑이다. 폐허 속에서 새 세상을 일구는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사랑이다. 꾸역꾸역 역사가 이어져온 것을 보면 사랑 근본주의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송영규 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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