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감성 지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제공하는 자와 누리는 자를 연결하는, ‘삶의 희로애락’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을 실은 노래와 연기·연주에 누군가는 환한 미소를, 누군가는 주체 못할 눈물을 내보이는 것도 퍼포먼스에 응축된 감성이 ‘통했다’는 방증이다.
인류가 축복처럼 누려온 이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 바로 인공지능(AI)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체득한 기교, 인류가 수백·수천 년에 걸쳐 쌓아온 예술 지식을 데이터로 저장해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AI는 문화예술 분야 곳곳에서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노래의 음 이탈도, 연주의 실수도 없는 AI 예술가들은 놀라움을 넘어 가슴 울리는 감동을 빚어내며 관객과 교감할 수 있을까.
SBS가 지난 29일 방송한 ‘세기의 대결! AI 대 인간’에서는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옥주현과 그녀의 목소리 데이터를 학습한 AI의 대결이 펼쳐졌다. 옥주현과 AI가 무대 뒤에서 박효신의 ‘야생화’를 번갈아 가며 부르면 방청객과 패널들이 이를 듣고 진짜 옥주현을 알아 맞히는 방식이었다. “가수는 노래할 때 ‘이 부분은 이래야 맛이 있어’ 하며 디자인하는데 (AI는) 그런 건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승리를 자신하던 옥주현은 AI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는 YB의 ‘흰수염고래’를 듣고는 “비슷하지 않았던 부분이 없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패널로 출연한 작곡가 김이나 역시 대결곡을 들은 뒤 “옥주현 특유의 발음과 습관도 똑같이 흉내 내더라"며 놀라워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세상을 떠난 지 30년 된 그룹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입힌 정인의 ‘오르막길’, 고(故) 김광석의 목소리로 완성한 김범수의 ‘보고 싶다’도 공개돼 감탄을 자아냈다. 연출을 맡은 남상문 PD는 “대결을 보는 재미와 더불어 현재 AI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확인하고, 위험 요소는 배제한 채 어떻게 AI를 이해하고 공존하며 발전시킬 지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방영된 엠넷의 ‘AI 음악 프로젝트-다시 한 번’에서도 김현식, 혼성그룹 거북이의 멤버 터틀맨 등 고인의 목소리가 AI로 복원됐다. 김현식을 재현한 AI는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를 불렀고, AI로 살아난 터틀맨은 미발표곡 ‘시작’을 불렀다. 작년 말 열린 빅히트 레이블즈의 연말 공연에서는 홀로그램과 AI의 목소리로 부활한 고(故) 신해철이 대표곡 ‘그대에게’를 부르기도 했다.
AI를 활용한 시도는 클래식 분야에서도 드물지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의 AI 로봇 피아니스트 ‘테오 트로니코’다. 2007년 첫 개발 후 꾸준히 업데이트 중인 이 로봇은 53개의 손가락과 피아노 연주에 필요한 주요 기술을 100여 개 이상 탑재해 클래식, 재즈, 블루스,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1,000곡 넘게 친다. 지난 2016년에는 이탈리아의 ‘인간’ 피아니스트 로베르토 프로세다와 함께 한국을 찾아 쇼팽의 녹턴,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 등의 곡으로 ‘인간 대(對) 로봇의 연주 대결’을 펴기도 했다. 입력된 음표를 정확하게 뽑아내는 AI와 자신의 해석을 담아 템포와 느낌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인간. 당시 연주를 본 다수 관객들은 “AI가 인간을 따라가긴 힘들다”고 평했지만, 고도의 기교를 소화하고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그대로 재연하는 면에서는 AI의 강점이 부각됐다. 지난 2013년에는 AI 로봇이 출연하는 일본 연극 ‘사요나라’가 국내에서 공연된 바 있다. .
영국 필하모니아관현악단 지휘자인 핀란드 출신의 에사 페카 살로넨도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 중이다. AI 기술을 활용해 관객 개개인의 목소리로 멜로디를 만들고, 그 위에 자신이 화음을 붙이는 창작 활동이다. 오케스트라에 다양한 기술 접목을 시도하는 그는 “바그너가 살아 있다면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신작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고도의 감정 몰입과 작품 해석이 중요한 연극·클래식 장르의 경우 아직은 신기함을 넘어서는 가능성보다는 한계와 아쉬움이 부각되는 것이 사실이다.공연계 관계자는 “관객들이 연주회를 찾는 것은 아티스트마다 다른 표현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라며 "연주, 작곡,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의 AI 진출이 화제가 됐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이 때문에 AI의 문화예술 분야 진출은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시도 자체로도 화제성이 있는 데다, 정부도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해 꾸준한 지원 계획을 내비치고 있다. 다만 놀랄 만큼 감쪽같은 재연에서 오는 불편함, 고인을 되살리는 행위의 윤리성 등 부정적인 이슈도 무시할 수는 없다. 남 PD는 “AI를 두려워만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기술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잘못 이용한 사람의 문제가 더 클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 박준호 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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