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에서 해안 경계 소초장으로 군 복무하던 2009년 여름, 책임구역 해수욕장에 엄청 큰 텐트가 설치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전에 통보받은 바 없는 만큼 대대 선배들이 알게 되면 전화로 족히 10분은 온갖 욕을 들어야 할 일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해가 기울고, 병사들을 모두 초소에 투입하고 나서 문제의 텐트를 찾았다. 겉면에 구조대라고 쓰여 있던 텐트는 농사용 비닐하우스처럼 거대해보였다. 이를 백사장 밖으로 옮기기는 어렵겠지만, 할 만큼 했다는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잔뜩 주늑들어 입구에서 심호흡을 하는데 별안간 문이 활짝 열리고 눈앞이 번쩍 했다.
정동남이었다. 이마에 있는 점만 봐도 확실했다. 그는 당황해서 “어 여기…”라며 버벅이는 내게 슥 웃어 보이며 “구조활동을 하러 왔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저것 간단하게 설명하는데도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당시 총을 들었다는 긴장감 때문에 사람에게 밀린 적 없다고 자부했는데 그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10년이 지나도 강렬한 눈빛과 다부진 체격, 그와 반대되는 부드럽고 정감가는 말투가 여전히 생생하다
결국 ‘아니 우리 쪽에는 전달받은게 없는데 백사장에 이렇게 텐트를 설치하시면 어떡하냐’고 하려던 내 입에서는 “어유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좋은일 하시네요. 수고하세요”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그 일 이후 단 한번도 그를 콧바람 센 아저씨로 생각해본 적 없다. 그로부터 얼마 뒤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에서도, 세월호 침몰사고에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현장을 지휘하는 것을 보며 뒤에서나마 응원하는 마음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하면 콧바람으로 찌그러진 페트병을 펴는 모습부터 떠올린다. 날계란을 순식간에 먹거나, 성냥갑에 붙은 불을 콧바람으로 끄거나, 이빨로 맥주캔을 뜯어버리거나…. 9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지금의 30대 중·후반에게는 그를 배우보다 개그맨이나 차력사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MBC every1 ‘비디오 스타’에 출연한 그는 불타는 성냥갑 5개를 콧바람으로 끄고, 김민희의 노래에 가발을 쓰고 춤추며 여전히 유쾌한 매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한강에서 숨진 동생으로 인해 인명구조 봉사활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를 전하는데 있었다.
1975년부터 봉사활동을 하며 580여명의 시신을 수습한 그의 아직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는 지난 3일 방송된 KBS2 ‘TV는 사랑을 싣고’를 통해 공개됐다. 그가 수많은 현장에서 마주했던 유가족 중에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정희 씨와의 재회는 봉사의 순수함과 평생을 간직했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깊이 있는 감동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21년 전 선유교에서 숨진 동생을 수습한 정동남에게 돈 봉투를 건넸지만 자신들은 ‘순수한 봉사단체’라며 이를 돌려받은 이 씨는 민간 구조대원이 됐다. 정동남은 구조 활동은 위험한 환경에 많이 노출됨을 알면서도 이 씨를 살피고 챙기지 못했던 것에 가슴 아파했고, 그에게 큰절하며 눈물을 쏟아낸 이 씨는 너무 큰 빚을 진 것 같아 찾아가지도 전화도 못했다며 자신도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했다.
이 씨와의 만남은 그가 구조 활동 중 심장미비와 뿌연 강물 속에서 그물에 엉켜 죽음 직전에 몰렸음에도, 구조 활동으로 인해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에 대한 미안함에도 계속 사고 현장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백마디 말보다 손을 맞잡고 서로 다독이는 그 모습은 어떤 영화나 다큐멘터리로도 표현해낼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앞으로도 그가 계속 콧바람으로 페트병도 펴고 성냥갑 불도 껐으면 좋겠다. 치아의 힘으로 사람도 계속 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도 힘센 점백이 아저씨로 사람들에게 편안한 웃음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10여년이 그랬듯 언제나 그와의 만남을 기억하며 조용히 응원할 것이다. 다만 이제 사회면 뉴스에서만큼은 그만 만나기를….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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