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발빠르게 대중국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일본·호주·인도와 함께 쿼드(Quad) 정상 회의 개최를 조율하며 ‘민주주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 한편 남중국해에 미 제7함대를 투입해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국가들을 지원사격했다. 또 미중 외교 수장 간 전화 통화에서는 신장·티베트·홍콩 사태를 거론하며 인권 문제를 통한 대중 압박을 본격화했다.
7일 일본 교도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일본·호주·인도 등 4개국은 쿼드 정상 회의를 온라인으로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쿼드와 관련한 외교 장관 회의는 뉴욕·도쿄 등에서 두 차례 열렸지만 정상 회의 추진은 처음이다.
미국은 아울러 7함대 소속의 이지스 구축함 ‘존 매케인함’을 5일(현지 시간) 남중국해에 투입해 ‘항행의 자유’ 작전을 실시했다. 앞서 존 매케인함이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대만해협을 통과한 데 이어 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 파라셀제도를 항해한 것이다.
여기에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은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과의 첫 통화에서 신장·티베트·홍콩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블링컨 장관은 중국이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대한 비판에 나서줄 것도 요구했다고 미 국무부는 전했다.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바이든 대통령은 경제와 인권 문제를 포함한 포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며 “미국이 다각적 압박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지난 5일(현지 시간) 미국 국무부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원과의 통화 사실을 전하면서 “블링컨 장관은 미국이 신장과 티베트·홍콩을 포함해 인권과 민주적 가치를 계속 지지할 것임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를 비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대중 압박에는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의 대중 압박 포위망이 넓어지는 동시에 촘촘해지고 있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이뤄진 첫 외교 당국자 간 통화에서 미국은 중국의 최대 이해관계가 걸린 대만과 홍콩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 했다. 이처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미국이 대중국 압박 전선을 넓히고 있으나 미중 사이에 낀 우리 정부는 분명한 외교 전략을 여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미국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항해의 자유’를 내세우며 중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4일 미 제7함대 소속 존매케인함이 대만해협을 통과한 데 이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 파라셀제도 인근을 항해했다. 중동에 있던 니미츠 항공모함 전단도 이날 남중국해에 진입해 무력시위를 했다.
대만해협은 양 정치국원이 “가장 민감한 사안”이라고 했을 정도로 중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곳이다. 그는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과 중미 3대 연합 코뮈니케(미중 간 상호 불간섭과 대만 무기수출 감축 등을 위한 양국 간 합의)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며 “홍콩과 신장·티베트 등은 중국 내정으로 어떠한 외부 세력의 간섭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바이든 정부는 이밖에도 홍콩과 신장·티베트 등 중국이 민감해 하는 지역의 인권 문제를 대놓고 제기하고 있다. 제임스 린지 미 외교협회(CFR) 부회장은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독재자와 인권유린자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며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도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이 대중 정책의 큰 틀을 분명히 잡은 만큼 한국을 포함한 주요 동맹에 대한 ‘반중(反中) 전선’ 참여 요구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과 일본·호주·인도의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도 화웨이 같은 중국산 장비를 5세대(5G) 통신망에서 퇴출하는 클린네트워크를 포함해 대중국 압박을 위한 다자협의체에 동참하라는 미국 정부의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민주주의·인권 등을 기반으로 ‘가치 동맹’을 묶으려는 미국의 움직임이 본격화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이다. 특히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관련해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관련 논의가 사실상 중단되며 국제 인권 문제에 있어서 사실상 역행하고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은 지난 10년 간 한국 정부에 35건의 의견 개진을 요청했다. 이 중 북한군의 서해 공무원 피격, 북한인권단체에 대한 통일부의 표적 감사, 동해 나포 북한선원의 재북송 등 18건에 대한 의견개진 요청이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에 이뤄졌다.
인권 문제의 주무부처인 국가인권위원회 내에서도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는 문 정부 들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권위는 지난 2011년 북한 인권 대응 역량을 키우기 위해 ‘북한인권특위’를 출범한 후 총 51회의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이명박 정부 후반기(2011~2012년) 22회, 박근혜 정권 기간(2013~2016) 총 21회 열렸지만 문 정부 출범 후 4년 동안 8회로 감소했다. 지난해 정치권에서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과 북한인권법을 활발하게 논의했지만 인권위는 특위 회의를 한 번 여는 데 그쳤다. 지난해 인권위가 북한인권특위 연장 여부를 의결할 때는 ‘특위 운영 종료’ 을 논의하기도 했다. 미국 국무부가 ‘대북인권특사’의 재임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북한 인권 논의는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미국 국무부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북한은 불법적인 핵·탄도미사일 프로그램 및 이와 관련한 고급 기술을 확산하려는 의지가 있고 이는 국제 평화와 안보에 위협적”이라며 정면 반박했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5일(현지 시간) 정 후보자의 발언에 대한 자유아시아방송(RFA) 논평 요청에 “북한이 지구적인 비확산 체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면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평가하고 동맹·동반자 국가들과 이 문제를 다룰 접근법을 채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가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도 기존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고수하는 가운데 미국 조야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대북정책에서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 한미 간 엇박자가 노출되는 셈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제네바 핵 협상 등에 참여한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은 “문 대통령은 신뢰할 만한(convincing) 증거 없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김정은이 비핵화 추구에 진지하다고 주장했다”면서 “북한과의 조속한 관여를 희망하며 바이든 행정부에 또다시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을 지낸 게리 세이모어 박사도 “지금은 북한이 핵 포기 의사가 없는 것 같다. 당면한 목표는 핵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외교부 장관 인사 청문회에서 정 후보자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사는 아직도 있다고 본다”며 “(북한은) 2017년 11월 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한 후 전략적 도발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sedaily.com, 뉴욕=김영필 기자 susopa@sedaily.com, 김정욱 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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