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반, 아쉬움 반이라고 해야 할까요? 둘 중에 아쉬움은 넣어두고 자신감만 가지고 로스앤젤레스(LA)로 갑니다.”
미국프로골프(PGA) 2부 투어에서 3년 간 고생한 뒤 꿈의 무대인 PGA 투어에서 세 시즌째를 맞고 있는 이경훈(30·CJ대한통운)은 이달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 지난 8일 끝난 피닉스 오픈에서 나흘 내내 선두 경쟁을 벌인 끝에 1타 차 공동 2위를 한 것이다. 아쉽게 첫 우승 기회는 놓쳤지만 데뷔 후 최고 성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약 7억 원의 상금도 벌어 최근 얻은 집 대금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최근 서울경제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이경훈은 다음 출전 대회인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을 벼르고 있었다. 오는 18일 LA 인근 퍼시픽 팰리세이즈의 리비에라CC에서 개막하는 이번 대회에는 세계 랭킹 톱 10 중 7명이 출전한다. 대회의 총 상금은 930만 달러. 메이저 대회와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시리즈를 빼면 최고 수준이다.
이경훈은 “오랜만에 우승 경쟁을 한 뒤 곧바로 좋은 기억이 많은 대회에 나가게 돼 기대가 된다”고 밝혔다. 그는 “PGA 투어 첫 해에 계속 컷 탈락하다가 이 대회를 기점으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작년도 마찬가지였다”며 “코스도 저와 잘 맞는 느낌”이라고 했다. PGA 투어에서 처음 톱 25에 오른 게 2019년 이 대회였고, 지난해는 공동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리비에라CC의 그린은 악명 높은 포아 아누아 잔디로 덮여있다. 볼 구름이 불규칙해 본대로 쳐도 홀을 벗어나기 일쑤다. 하지만 그린 적중률 84%(공동 4위)와 그린 적중 때 퍼트 수 1.68개(11위)를 기록한 피닉스 오픈 당시의 감만 유지한다면 또 한 번의 우승 경쟁도 기대할 만하다. 이전 대회에서는 그린 스피드 파악에 애를 먹어 3퍼트도 종종 범했는데 피닉스 오픈에서는 스피드 맞추기 집중 훈련의 효과를 봤다고 한다.
이경훈은 “긴장감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경기를 잘 풀었다는 게 지난 대회의 가장 큰 수확”이라며 “우승권에서 떨리고 긴장하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우승도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피닉스 오픈 뒤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부에 계속 남아 제네시스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경훈은 국내 최고 권위 대회인 한국 오픈을 2연패(2015·2016년)한 선수다. 일본 투어 우승 경험도 두 차례 있다. 그대로 국내나 일본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이경훈은 도전을 택했고, 올해 들어 서서히 결실을 보고 있다. 2016년 한국 오픈에서 72홀 코스 레코드 타이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을 때 한국으로 아예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이경훈은 “그런 생각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잘 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던 것 같다. PGA 2부 투어 파이널 시리즈에 1타 차로 들지 못한 뒤여서 많이 ‘다운된’ 상태였는데 한국에서의 우승으로 다시 도전할 힘을 얻었다”고 돌아봤다.
그가 분석하는 PGA 1부와 2부 투어의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 “예전만 해도 2부 투어는 장타자에게 확실히 유리하고 PGA 투어는 정교한 플레이를 요구했지만, 트렌드가 많이 바뀌어 요즘은 PGA 투어도 러프를 짧게 깎고 그린은 부드럽게 조성해 장타자에게 어드밴티지를 많이 주는 편”이라고 그는 전했다. 이경훈은 그 자신도 “그에 맞춰서 거리를 내려고 한다”면서도 "다만 무리해서 거리를 늘리려는 것은 아니고 군더더기 없는 좋은 스윙 동작을 갖추면 스피드는 자연스럽게 올라간다는 생각으로 계속 좋은 동작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1·2마일씩 스피드를 늘린 결과 3~5야드 정도 더 멀리 보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스무 살 때 함께했던 스윙 코치를 지난해 말 미국으로 초청해 한 달 가량 다시 배웠던 게 거리 증가는 물론 경기 운영 전체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미국 와서 여러 코치들을 거치는 동안 본연의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는데 옛 스승님과 함께하면서 그동안 너무 많이 쌓였던 지식과 정보를 비우는 작업이 잘 이뤄진 것 같다”고 밝혔다.
이경훈은 올 여름에 아빠가 된다. ‘축복이’라는 태명의 딸아이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 이경훈은 “이게 책임감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심적으로 강해지는 느낌”이라며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예쁠까’ ‘어떻게 키우는 게 잘 키우는 걸까’ 같은 생각들로 가득하다”고 환하게 웃었다.
5년 전 쯤 미국으로 떠나면서 “죽어도 미국에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독하게 하겠다. 로리 매킬로이(전 세계 1위·북아일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선수가 될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던 이경훈은 "지금도 그때 그 마음 그대로”라고 한다. “작년에 매킬로이랑 한 번 같은 조로 쳤어요. 감탄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좀 더 좋은 공을 치면 해볼 만하겠다 하는…. 그럴 날이 반드시 오겠죠?”
/양준호 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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