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기자로 첫 발을 내디뎠던 회사가 3년 만에 사라졌다. 모기업의 계열사 구조조정 때문이라고 했다. 10명도 넘는 식구들이 방향을 잃고 헤맸다. 회사는 약간의 시간을 줬지만, 부서가 기사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할 일 없이 도로 경계석에 멍하니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주말도, 명절도 없이 일했다. 덕분에 20대 후반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연극과 뮤지컬, 영화와 드라마로만 가득하다. 공연을 본 뒤 집까지 가는 것이 귀찮아 대학로에 방까지 얻었다. 정신없이 보고 썼고, 잘 뽑혀나오면 그런대로 만족하는 삶이었다.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것이었던 책상은 남았지만,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20대 후반을 모조리 바친 열정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다 타버리고 숯이 되어버린 가슴에 다시 불붙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두려웠다. 또 모든 것이 사라질까봐.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춤했다.
탕비실 구석, 정은(유다인)의 책상은 있으나 그의 자리는 아니다. 1년간 파견근무를 다녀오면 원복 시켜주겠다는 상사의 말에 결국 지방의 하청업체로 내려간다. 7년 동안 성과 대신 나를 갉아먹은 그에게 회사는 냉정하고 냉혹하다. 빨대 사이로 술이 술술 들어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길가에 내몰리는 공포 대신 1년의 유예를 택했다.
산 중턱에 아무렇게나 놓인 가건물. 정장을 입고 나타난 그에게 송전탑을 관리하는 하청업체 직원들은 도시락집 새 직원 구했냐고 한다. 소장은 대뜸 ‘진짜 왔네, 당신 자리 여기 없다’고 선을 긋는다. 위장전입하려고 왔냐는 말에 그는 그렇다고 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는 그저 잠시 들렀다가 돌아갈 곳일 뿐이니.
사람들은 직원이라고는 넷 뿐인 하청업체에서 매뉴얼을 따지고, 철탑에 오르지도 못하면서 따라다니는 그가 불편하다. “일을 줘야 일을 하죠”라며 내가 왜 업무평가 D를 받아야 하는지 따지는 그가 더 불편하다. 결국 울며겨자먹기로 정은을 떠안은 막내(오정세)는 그를 송전탑 앞에 앉혀놓고 혼자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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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못 하는 사람이 새로 오면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다 하는게 빠르다. 어차피 금방 그만둘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켜야 할 세명의 딸을 둔 막내는 나눔 대신 효율을 택한다. 퇴근 후에 편의점, 대리운전까지 쉴 새 없이 일하며 살아가는 그는 또 소주를 사러 온 정은에게 묻는다. ‘언제 떠날거냐’고. 그리고 그는 답한다. ‘지금 떠나는 중’이라고.
마음은 급한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애꿎은 화풀이를 들은 막내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두 번 죽는거 알아요? 한번은 전기구이 한번은 낙하. 34만5000볼트에 한방에 가거든요. 그런데 그런거 하나도 안무서워요. 우리가 무서운거는 해고에요”란다. 담담하게. 정은은 생각한다. 죽음과 해고가 다른가…. 그의 작업복을 탓하며 막내가 영수증에 전화번호 하나를 적는다. 방전이 되는 특수 작업복 구입처를.
송전탑에 오르는 연습을 하지만 쉽지 않다. 본사에서 나온 평가관들 앞에서 정은은 또다시 패닉에 빠진다. 그때였다. “밑에 보지 마시고 위에만 보고 올라가세요. 계단 올라간다고 생각하시고.” 막내의 한마디는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진 것처럼 요동친다. 자신도 처음에는 무서웠다는, 높은 곳에 내가 지켜야 할 딸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올랐다는 그의 말 끝에 “박 대리님은 누구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잠시 숨을 고른 정은은 한발, 또 한발 올라선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회사는 여전하다. 날카롭고, 건조하다. 말은 칼처럼 예리하게 심장을 찌르고, 조롱과 멸시의 눈빛은 폐를 찔러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든다. 버티고 버텨보지만 이미 알고 있다. 희망 따위는 탕비실로 책상을 옮기는 순간 모두 사라진 것을. 절친한 동료였던 혜숙(최자혜)이 찾아와 말한다. 내가 네 자리로 옮겼다고.
일이 목숨처럼 여겨지는 세상, 모두가 하루하루 얼음판 같은 회사의 바닥 위에서 살아간다. 나를 잃으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공포는 항상 뒤통수 한뼘 위에서 내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내가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일이든 삶이든 모두.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내가 끝내기 전에는….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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