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떠난 마지막 여행지는 이탈리아였다. 베네치아의 태양이 드넓은 바다로 잠기는 순간 작가는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낮 동안 세상을 비추며 빛으로 존재하던 태양은 질 무렵에야 비로소 둥근 제 모습을 드러냈고 내려앉으며 선(線)이 되어 누웠다. 하늘과 바다, 두 푸르름이 맞닿은 자리가 가늘고 붉게 빛났다. 촬영에 넋 나간 작가가 난간 너머로 빠질 듯한 기세였는지, 뒤에 있던 남편이 내내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3점 연작을 나란히 붙여 4m 폭의 벽 전체를 채우니 그 시간 그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원로 사진작가 송영숙(73)의 ‘어나더…메디테이션(Another…Meditation)’이다.
작품명과 같은 제목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의 아트파크 갤러리에서 한창이다. 폴라로이드 사진에 천착하며 50년 가까이 표현주의적 작업을 선보여 온 송 작가는 지난 2018년 개인전 ‘메디테이션’에서 휴대폰 카메라로 매체를 바꿨다.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전시지만, 자연 전반을 관조하던 전작에서 좀 더 깊이 파고든 이번 전시는 하늘을 담고 구름을 품었다.
전혀 편집하지 않은 스트레이트 사진임에도 회화성이 충만하다. 1층 전시장 큰 벽에 걸린 4점의 하늘은 그야말로 ‘그림 같다’. 쾌청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왔다가 부리나케 빠져나가면서 말갛고 푸른 하늘을 다시 내보이는 순간을 포착했다. 요동치는 자연의 천변만화는 인생과 다를 바 없다. 그 옆에 걸린 오렌지빛 하늘은 ‘추상회화’를 보는 듯하다. 구름의 형(形)을 버리고 색(色)을 얻었다. 그 안에 담긴 작가의 내면, 풍경에 투사하는 관람객의 심상은 덤이다. 전시의 부제는 ‘나는 자연을 훔쳤다’. 이면에 숨은 뜻은 ‘나는 마음을 뺏겼다’ 일지도 모른다.
요동치던 구름 작업의 맞은 편에는 유난히 구름이 낮게 드리운 제주 하늘이 걸렸다. 내려앉는 구름인지 걷히는 구름인지 가늠할 수 없다. 실눈뜨기 시작해 세상을 직시하기 직전의 찰나, 혹은 삼라만상을 내려놓고 눈감으려는 순간을 비유적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송 작가는 숙명여대 교육학과에 재학 중이던 지난 1969년 첫 개인전 ‘남매전’으로 등단했다. 폴라로이드가 빛의 예술인 사진의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그 즉각성과 우연성의 묘미를 살려 빛을 그려왔다. 표면을 긁거나 문지르는 방식을 더해 순수한 빛에 변화를 가미하거나, 사진 위에 격자를 만들어 화면과 피사체를 재구성하는 등의 시도로 작품을 변주했다.
중국의 사진작가 왕칭송은 이번 전시의 서문에서 “구름을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이토록 간결하고 고요하게 찍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면서 “같은 구름을 보고도 보는 사람이 순간의 감정에 따라 각자 다르게 구름을 받아들이듯, 구름은 거울과도 같고 구름을 보는 건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적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송영숙은 색채에 대해 독특하고 주관적인 통제력을 발휘한다”고 호평했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원로 사진작가 제리 율스만은 “송영숙의 작품을 마주하면 자연과 교감하면서 깊은 사색의 장으로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서 “보는 이에게 자연이 가진 무한한 생명력을 전한다”라고 내면을 드러낸 작업들에 대해 짚었다.
기업인 이전에 50년 활동 사진작가
전시가 개막하던 지난 17일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정중히 인터뷰를 사양했다. 평소 오프닝 때와는 달리 “기업인이 아닌 작가로 나온 것인 만큼 말을 삼가야 작품에 더 집중해 주실 듯하다”라며 말을 아꼈다. 지난해 남편인 임성기(1940~2020) 한미약품 창업주 회장이 타계한 후 자리를 이어 받은 그는 요즘 ‘한미약품 회장’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번 전시는 회장 취임 후 처음 열린 그의 개인전이다. 하지만 송영숙은 기업인이기 이전에 50년 이상 활동한 사진작가다. 지난 2002년 공익문화예술재단으로 가현문화재단을 설립해 2003년 국내 제1호 사진전문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을 개관한 후 ‘관장’ 꼬리표가 붙었을 때도 그는 늘 자신을 “사진작가예요"라고 소개했다.
대신 모자부터 신발까지 검은색으로 맞춰 입고 전시장에 선 작가의 모습은 떠나보낸 이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했다. 여행지의 하늘, 병실 밖 구름 등 작품 밖 작가 곁에는 늘 반려자가 함께했다. 단 한 장, 2층을 오가는 계단에 걸린 작품만 남편을 묻고 오는 길에 찍은 것인데 청명한 하늘에 걸린 비행기 닮은 구름이 작가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하다. 전시는 3월31일까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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