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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내탕금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은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왕실 재산인 내탕금(內帑金)으로 거금인 1만 냥을 지출해야만 했다. 당시 묘지 부근에 살던 244가구의 백성들에게 시세의 두 배를 웃도는 보상금과 이사 비용을 지급하고 주변에는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여 그루까지 식수했다. 일꾼의 품삯도 일일이 기록에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묘를 옮기는 데 사사로이 세금 쓰기를 꺼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내탕금은 조선 시대 왕실의 사유 재물로 내수사(內需司)에서 특별 관리했다. 대호족 출신인 태조 이성계가 함경도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봉토를 소유한 것이 내탕금의 원천이었다. 왕이라도 국가 재정을 마음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 묘지 확장, 사찰 건축 등에 내탕금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안성 등 경기 지역에 내탕금이나 왕실의 지원을 통해 사찰이 증수되거나 창건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내탕금은 재해가 닥쳤을 때 백성 구휼 등 공적인 분야에도 투입됐다. 영조는 1734년 흉년이 들자 내탕금을 풀었고 철종은 “백성들의 형편이 애통하고 나라의 회계가 거덜 난 것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었다”며 내탕금 5만 냥을 나눠줬다. 고종은 1891년 조선 최초의 해외 공관이었던 주미 워싱턴 공사관 건물을 사들이는 데 내탕금 2만 5,000달러를 썼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동궁전에 배당된 내탕금을 탕진했다가 영조의 미움을 샀다는 설이 있으며 연산군은 내탕금 고갈 등의 이유로 결국 왕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4·7 보선을 앞둔 시점에 문재인 대통령이 ‘전(全) 국민 위로 지원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선 시대 내탕금으로나 할 수 있다”며 “대통령의 사재를 모아서 주라”고 꼬집었다. 왕조 시대에도 나라 곳간을 함부로 열지 못했는데 현대 민주주의국가에서 집권자가 국민 혈세를 동원해 생색을 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악화일로의 나라 재정을 생각하면 정치 지도자들이 세금으로 매표를 시도한다는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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