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난민’ 받아라~”
‘확률형 아이템’ 논란에서 출발한 게이머들의 분노가 게임계 전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돌아선 팬은 안티보다 무섭다고 했던가요. 18주년을 맞은 넥슨의 장수게임 메이플스토리마저 확률형 아이템 논란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됐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열성적인 메이플스토리 유저였으나 현재는 적을 둔 게임이 없다는 뜻에서 난민에 스스로를 빗댄 ‘메난민(메이플스토리 난민)’ 선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운영에 대한 평가가 좋은 게임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됐습니다. 스마일게이트의 MMORPG(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게임) ‘로스트아크’가 대표적입니다.
논의를 촉발한 것은 한 대의 트럭이었습니다. 연초 넷마블의 RPG(롤플레잉게임) '페이트 그랜드 오더(페그오)' 유저들이 일방적인 이벤트 종료에 분노해 아이디어를 모았던 것이 시초였죠. 반나절 만에 1,000만원이 모금됐고 권영식 넷마블 대표의 공식 사과와 본부장 사퇴를 이끌어냈습니다. 게이머들의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항의가 위력을 발휘한 사례입니다.
페그오 사건은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라비티, 엔씨소프트, 넥슨의 게임을 대상으로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국내 주요 게임사들이 둥지를 튼 판교에는 ‘트럭 주의보'가 떴습니다. 항의 대상인 게임와 게임사는 각각 달랐지만 이들의 불만은 모두 같은 단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게임사의 ‘불통’입니다. 이들은 “점점 더 불합리해져 가는 게임사의 운영 정책에도 지갑을 여는 호구가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 기저에는 확률형 아이템이라는 한국 게임계의 비즈니스모델(BM)과 관련한 근본적인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확률형 아이템. 말 그대로 획득 여부가 모종의 확률에 달린 아이템입니다.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서 레버를 돌려 뽑았던 ‘뽑기'와 유사한 비즈니스모델이죠. 유저는 얼마간의 확률로 어떤 아이템을 뽑을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뽑기에 중독될 공산이 큽니다. 원하는 아이템이나 효과가 나오지 않으면 아쉬움에 계속 돈을 쓰게 되고, 낮은 확률로 원하는 것을 얻으면 짜릿한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또 한번 뽑기에 매달리게 되는 거죠. 이는 슬롯머신 도박의 기본적인 원리와 상통합니다.
한국 게임사들은 이런 확률형 아이템과 관련한 비즈니스모델을 오랜 기간 동안 발전시켜왔습니다. 특히 모바일 게임으로 국내 게임 매출의 무게추가 옮겨오면서 유저들에게 복수의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확률형 아이템으로 과금을 유도하는 경향은 더욱 심화했습니다. 단순히 원하는 아이템이나 효과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수준을 넘어서 주문서나 비서 같은 재료를 ‘합성’해 2차, 3차 아이템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장비나 무기를 ‘강화’하고 ‘옵션(능력치)’을 부여하는 시스템은 물론이죠. 강화에 실패하면 아예 장비 자체가 파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치밀하게 고도화된 비즈니스모델은 사실상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죠.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상황입니다. 내 돈 500만원을 주고 컴퓨터를 맞추는데, 이 컴퓨터가 켜질지 안 켜질지는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당연히 환불도 안 되고요. 자칫하면 컴퓨터를 아예 새로 사서 또 한번 미지의 확률에 도전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썼는데도 제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어떤 확률로 얻을 수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소비자인 게이머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확률이 낮은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면 더 문제겠죠. 현재 우리 게임업계는 한국게임산업협회의 ‘건강한 게임문화 조성을 위한 자율규제 강령’에 따라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자율적으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강령은 ‘캡슐형 유료 아이템(일명 랜덤박스)’의 확률을 공개해야 한다고 명시할 뿐, 2·3차 합성이나 뽑기 과정을 거쳐 만들어내는 최종 아이템에 대한 확률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는 빠져 있습니다. 리니지2M에 출시된 최상위 등급 무기 ‘신화 무기’와 관련해 이 같은 논란이 일기도 했죠.
이처럼 확률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으면서 확률이 임의로 조작될 수 있다는 ‘변동확률' 논란까지 불거졌습니다. 메이플스토리에서는 ‘환생의 불꽃’ 아이템을 통해 장비에 부여되는 추가 옵션 부여 확률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나왔습니다. ‘점프력’ 같은 쓸데없는 옵션이 붙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조정돼 있던 것이 아니냐는 거죠. 여기에 대해 메이플스토리 측이 “모든 추가 옵션이 동일한 확률로 부여될 수 있도록 변경됐다”고 패치 결과를 밝히면서 사실상 각 옵션에 대해 서로 다른 확률이 부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자인해 유저들의 반발을 부른 사건입니다.
게이머들의 분노는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트럭 시위는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고, 여기에 더해 캐릭터를 삭제하는 ‘갈갈' 인증부터 충전 한도액을 0원으로 만드는 ‘한도 0원 챌린지’까지 유행입니다. ‘프리 투 플레이(Free to play)’ 방식으로 무료 입장하게 한 뒤, 확률형 아이템을 비롯한 각종 유료화 모델로 매출 대부분을 올리는 구조의 한국 게임이 전례 없는 위기를 맞게 된 셈입니다.
국회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대표 발의한 게임산업진흥법 전부개정안이 탄력을 받게 됐습니다. 법안에는 확률형 아이템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확률형 아이템을 법적으로 정의하면서 아이템 뽑기 확률 공개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게임산업계가 반발하자 이 의원은 “게임산업계는 여러 차례 주어진 자정 기회를 외면했고, 게임 이용자의 신뢰가 사라지고 불만은 계속 커져 왔다”며 “확률 공개는 이용자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알 권리”라고 법안의 필요성을 설파했습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시 지난 2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한국 유저들이 죽어도 돈을 안 쓰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이런 기형적인 과금 유도 정책이 정말 필요한 걸까요. ‘프리 투 플레이’를 표방하면서 사실은 매달 수십만원의 ‘현질(현금 결제)’ 없이는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한 모바일 게임들을 돌아보면, 세계 4위 게임 강국이란 타이틀이 무색해집니다. 유저를 기만해서 쌓아 올린 허명(虛名)이 아닌가 해서요.
같은 MMORPG 장르인 블리자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나 10년 넘게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리그오브레전드(LoL) 같은 게임이 확률형 아이템 때문에 잘됐을까요. 투명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당당하게 유료화할 부분은 유료화해도 얼마든지 좋은 게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 게임=도박’이라는 불명예를 벗기 위해서 오히려 게임산업계가 먼저 나서야 할 때입니다.
/오지현 기자 ohj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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