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이민 정착기를 다룬 영화 ‘미나리’가 미국 양대 영화 시상식 중 하나인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간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 레이스를 이어온 데 이어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성을 재차 인정 받음에 따라 오는 4월 열리는 미국아카데미시상식(오스카)에서 ‘미나리’가 수상작으로 호명될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영화를 만든 한국계 미국인 감독 정이삭(리 아이작 정)은 이날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전하는 과정에서 함께 등장한 어린 딸을 가리켜 “딸이 바로 제가 ‘미나리’를 만든 이유”라며 ‘가족의 힘’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는 28일(현지시간) 오후 뉴욕 레인보우 룸과 LA 베벌리 힐즈 힐튼 호텔에서 동시 연결 방식으로 올해 시상식을 열었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예년처럼 영화계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대신 발표자가 무대에서 수상작이나 수상자를 호명하면 영상 연결을 통해 수상 소감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발표는 ‘원더우먼’의 배우 갤 가돗이 맡았다. 가돗은 이 부문 후보작으로 미나리와 함께 덴마크의 ‘어나더 라운드’, 프랑스-과테말라 합작의 ‘라 요로나’, 이탈리아의 ‘라이프 어헤드’, 미국-프랑스 합작의 ‘투 오브 어스’ 등을 소개한 후 곧장 미나리를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영상에 등장한 정 감독은 스티븐 연·한예리·윤여정·앨런킴·노엘 케이트 조 등 출연 배우와 스태프, 제작·배급사, 가족에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미나리는 한 가족이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라며 “그 언어는 미국의 언어나 그 어떠한 외국어보다 깊은 진심의 언어(Language of Heart)”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정 감독은 “저 스스로 그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물려주려고 한다. 서로가 이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길 바란다. 특히 올해 그랬으면 한다” 고 덧붙였다.
앞서 정 감독은 지난 달 26일 한국 취재진과 가진 화상 간담회에서도 “영화가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이거나 이민자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인간 관계를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헤쳐 나가는 걸 보면서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특정 나라나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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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 언론들은 이날 미나리의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 다시 한번 HFPA의 운영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정 감독의 수상 소감을 두고 “그의 영화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NYT는 “미나리는 골든 글로브의 ‘대사의 50% 이상 영어’라는 요구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독이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촬영됐고, 미국 회사가 자금 조달을 했음에도 외국어 영화로 분류됐다”며 “외국어 영화로 분류되면서 최우수 작품상 경쟁은 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해 같은 부문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한국 자본과 한국 감독, 한국 배우가 만든 한국 영화이지만 미나리는 정 감독은 물론이고 스티브 연 등 출연 배우 대다수도 미국인이다. 투자와 제작도 미국의 A24와 플랜B가 맡았다.
미국 연예 매체인 할리우드리포터도 “영화 분류 기준 때문에 최우수 작품상 경쟁에서 밀린 끝에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LA타임스는 HFPA 회원의 인종 편향성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논란에도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당당히 거머쥔 만큼 앞으로 남은 미국배우조합(SAG)상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광을 누릴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 것으로 평가된다. 미나리는 SAG상에서 최고 상인 앙상블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스티븐 연), 여우조연상(윤여정)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있다. SAG상 시상식은 다음 달 4일 열린다. 아카데미상은 오는 15일 후보 리스트를 발표하고, 시상식은 4월 25일 개최한다. 영화는 오는 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편 올해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은 처음으로 아시아계(중국) 여성인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노매드랜드'는 아카데미의 유력 후보로도 꼽히고 있다.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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