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총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차기 대선 지지율 1위에 오른 것은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는 메시지에 유권자가 공감한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국민의힘 지지층과 대구·경북(TK) 지역 유권자가 전국 평균(34.2%)보다 높은 지지를 보냈다는 점이다. 당초 정치권에서는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킨 장본인으로 평가 받는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과 TK에서는 큰 지지를 얻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윤 총장에 대한 높은 지지율이 수치로 확인되면서 정계 개편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TBS 의뢰로 지난 5일 윤 전 총장이 4일 사퇴 의사를 표명하며 언급한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는 발언에 대한 공감 여부를 물은 결과 응답자의 과반인 56.6%가 공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비공감’은 37.6%, ‘잘 모르겠다’는 답변은 5.8%로 집계됐다.
주목할 점은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는 중도 성향층이 61.6%나 공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유력 대권 주자로서의 잠재력과 확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진영별로 보면 역시 국민의힘 지지층(93.0%)과 보수 성향층(81.8%) 등 보수 진영은 다수가 공감을, 반대로 더불어민주당 지지층(79.5%)과 진보 성향층(70.6%) 등 진보 진영은 다수가 비공감을 표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법치와 공정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일들에 국민들이 많이 지쳐 있다”며 “한국토지주택공사(LH) 땅 투기 사건을 봐도 그렇고, 한국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롭지 않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특히 법치주의를 지키고 부패 수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맥락으로 이해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권 관련 수사를 저지하려는 모습에 사람들이 실망했다”며 “현 정권에 대한 실망이 윤 전 총장에 대한 기대로 옮겨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보수 진영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실상 대권을 노리고 있는 윤 전 총장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됐던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킨 장본인’ 꼬리표도 예상보다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층은 67.7%, TK 유권자는 35.3%가 각각 윤 전 총장을 지지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TK에서는 윤 전 총장이 일관성이 있다고 본다”며 “박 전 대통령이든, 문재인 대통령이든 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소신에 따라 검찰 조직을 장악하고 맞춰서 행동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TK에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변함이 없지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다르다”며 “박 전 대통령을 보수 몰락의 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정권을 교체해야 보수 명예가 회복된다고 하니 윤 전 총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킬레스건이 극복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면 강점으로 여겨졌던 대전·세종·충청의 지지세는 수치로도 입증됐다. 대전·세종·충청 유권자 37.5%가 그를 지지했다. 대전·세종·충청 유권자는 중도 성향층과 함께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한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윤 전 총장은 보수 성향층, 영남 유권자에 강한 지지 기반을 두고도 중도 성향층, 충청 유권자라는 두 캐스팅보트를 모두 거머쥔 셈이다.
유력 대권 주자로서의 윤 전 총장의 가능성이 여실히 입증되면서 정계 개편 논의도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로서는 국민의힘에 입당하기보다는 스스로 제3 지대의 구심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김 교수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제3 지대로 나와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 제3 지대 야권 재편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며 “윤 전 총장이 대권에 도전하면 별도의 중도 신당을 만들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처럼 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최 교수도 “국민의힘에 섣불리 합류하면 지지율과 동력이 떨어질 것”이라며 “윤 전 총장 입장에서 보면 제3 지대를 구축하되 거기 머물면 안 되고 새로운 중도 세력을 규합하면서 제1 세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지훈 기자 jhlim@sedaily.com, 김혜린 기자 r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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