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취업준비생 A씨는 얼마 전 문자메시지를 통해 알게 된 한 회사로부터 ‘취업하고 싶으면 급여통장 계좌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루빨리 백수 신세를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개인정보를 넘겨줬다. 며칠 뒤 학자금 대출 연장을 위해 은행을 찾은 A씨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포통장으로 이용돼 만기대출 연장이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망연자실했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 이어지면서 20대 청년층을 노린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젊은 층도 쉽게 속을 정도로 사기수법이 진화한데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10~20대 청년일수록 취업을 미끼로 한 보이스피싱 범죄에 취약해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한해 피해금액만 7,000억원에 달할 만큼 관련 범죄가 끊이질 않으면서 서울경찰청은 보이스피싱 범죄 척결을 올해 핵심과제로 내걸고, 데이터분석과 수사기법 개발 등을 통한 새로운 대응전략을 시행키로 했다.
21일 서울경제가 경찰청에서 입수한 최근 5개년 보이스피싱 피해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0~20대의 보이스피싱 피해건수는 5,323건으로 전년(3,855건) 대비 38%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같은 기간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가 3만7,667건에서 3만1,681건으로 16% 줄어든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욱이 연령대별 피해자 현황에서 30대(-27%), 40대(-25%), 50대(-22%), 60대(-9%), 70대 이상(-21%) 등 20대 이하를 제외한 전 연령층의 피해 건수가 감소했다. 그동안 보이스피싱 피해가 주로 노년층에 집중된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이처럼 유독 10~20대 청년층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취약해진 이유에 대해 금융범죄 전문가들은 최근의 극심한 실업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코로나19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 20대 청년층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피해가 급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취업난에 절박한 청년층일수록 보이스피싱 조직의 교묘한 수법에 쉽게 넘어간다는 분석이다. 실제 금융감독원 금융사기대응팀에 따르면 최근 보이스피싱 수법 중 취업 관련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개인정보를 알아내 대포통장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마다 급증하던 보이스피싱 피해건수가 지난해 잠시 줄어들긴 했지만 피해액은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전체 피해금액은 7,000억원으로 2016년 1,468억원과 비교해 4년 새 5배 가까이 늘어났다. 수법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금융기관이나 수사기관을 사칭하는 문자를 보낸 뒤 피해자가 문자 속 링크를 누를 경우 악성코드를 통해 순식간에 개인정보를 빼간다. 설령 피해자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112에 신고전화를 해도 피싱조직의 번호로 연결돼 적발이 어렵다. 또 국외에서 발신된 인터넷전화의 표시번호를 변조해 ‘010’ 등 국내 번호로 바꿔주는 사설중계기 161대를 고시원 등에 설치해 운영하던 보이스피싱 조직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서울경찰청은 보이스피싱 척결을 올해 핵심과제로 정하고 집중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서울경찰청은 지난해 11월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집중대응팀을 구성해 일선 경찰서에서 개별 수사하던 사건들을 취합해 수사하고, 범죄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협업체계를 구축했다. 최종혁 서울청 수사과장은 “범인 검거에 중점을 둔 기존 수사방식에서 벗어나 보이스피싱 범행이 발생하는 단계마다 통신사나 은행 등 유관 기관과 협업해 범죄를 사전 차단하겠다”고 강조했다.
/방진혁 기자 bready@sedaily.com, 정혜진 기자 suns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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