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서울의 한 지하철 객실 안, 20대 여성 A씨는 60대 남성 B씨가 자신을 더듬으려 하는 것을 알아챘다. B씨가 치마 안쪽까지 손을 대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느낀 A씨는 지하철에서 내려 B씨에게 추행 사실을 항의하면서 소리쳤다.
A씨는 지하철 밖으로 B씨를 끌어 내린 뒤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 A씨는 코트가 다 열려있는 상황에서 B씨가 가방을 든 왼손으로 추행했다고 진술했다. 지하철 역사 계단에서 촬영된 폐쇄회로(CC)TV영상 캡쳐본 20장도 제출했다. 이후 성추행 혐의로 B씨는 재판에 넘겨졌고, 1심은 벌금 800만원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판단은 달랐다. A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다는 이유로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추행한 손을 오른손으로 바꿔 진술한 점, 추행 당시 코트가 활짝 열려 있다고 했지만 CCTV 사진에는 코트가 잠겨있던 점이 사실과 배치된다고 판단했다. 범행이 시작됐다고 인지한 전철역을 재판 과정에서 바꿔 말한 것도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트린다고 지적했다.
또한 지하철에서 즉각 B씨에게 소리치고 지하철 밖으로 끌어내려 신고할 정도로 용감한 A씨가 5분 동안 추행을 당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고 봤다. A씨와 B씨의 키가 비슷해 코트가 잠겨있는 상황에서 B씨가 몸을 숙이지 않고 물리적으로 추행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가 다시 한번 뒤집혔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강제 추행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성추행 피해자가 범행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진술이 일부 바뀐다고 해도, 핵심 내용이 일관된다면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A씨가 범행을 저지른 손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뀐 것도 피해자가 범행 당시 경황이 없어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탓이라고 봤다. 전철역을 바꿔 말한 점 또한 강제 추행 여부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부족해 A씨의 주장 전체를 배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2심에서 CCTV 사진이 A씨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부분도 뒤집었다. 강제 추행이 이뤄진 장소는 객실 안으로, 계단을 촬영한 사진이 A씨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증명할 직접적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2심에서 A씨가 즉각 대처하지 않았다고 판시한 부분도 성범죄 피해자가 처해 있는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원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기에 부족하거나 양립 가능한 사정, 혹은 공소사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수적 사항만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여 그 증명력을 배척했다”고 판시했다.
/구아모 기자 amo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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