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바다는 연인과의 로맨틱한 여행으로 기억되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먹고 살아야 하는 전쟁터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켜내야 하는 철책 그 너머의 어둠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일년간 검은 밤바다를 보며 많이 두려웠다. 그럴 일은 없을거라고 부하들과 나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때때로 낯선 자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수년간이나 지속되던 검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30대가 넘어 제주에 잠시 머물고 나서야 조금 나아졌다.
바다. 누구에게는 건너갈 수 없는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건너가야 할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이와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곳이다. ‘자산어보’가 그리는 검은 바다는 그 넓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희망이다.
정약전(설경구)의 바다는 극복할 수 없는 망망대해다. 흑산으로 유배 온 그의 눈에는 총기가 없다. 남은 삶은 연명하는 것, 그마저도 포기한 그 앞에 가거댁(이정은)이 문어로 탕을 끓여 내놓는다. 성화에 못이겨 딱 세입만 먹기로 한 그가 처음으로 맛본 싱싱한 문어. “문어가 원래 맛이던가.”
바닷가를 거닐다 처음 마주한 ‘빨간 똥구멍(홍미잘)’이라는 생물, 그리고 짱뚱어. 앉은뱅이 학자들은 알 수 없는 세상을 만난 그의 눈이 동그래진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라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 그는 선비의 짐을 내려놓고 필부(匹夫)의 삶을 택한다. ‘자산어보’는 땅 보다 낮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약용의 바다는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다. 평생의 벗이자 동지였던 형을 만날 수 없게 만든 벽이자, 다시 과거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절망이다. 그는 벽 앞에서 묵묵히 선비다운 삶을 이어간다. 서당을 만들고, 제자를 키운다. 목민관의 지침을, 제도 개혁을, 법의 재정비를 논하는 책을 쓴다.
창대(변요한)의 바다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서자로 태어나 섬에서 일평생 살아가야 하는 운명 앞에 바다 넘어 육지는 동경의 세계다. 명심보감 몇자 읽었다고 ‘성리학이 무너져 이런 세상이 됐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를 바로잡는 길은 자신의 입신양명 뿐이다. 나의 바다 지식과 약전의 학문을 거래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학문에 눈을 뜨는 그에게 약전의 자산어보보다 약용의 목민심서가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상놈의 자식’이 ‘창대야’가 되고, 이제는 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사이가 됐지만 창대에게 약전은 극복해야 할 삶이다. 어느날 약용의 제자를 정중하게 보낸 약전에게 이것저것 따져묻자 돌아온 말 “너 딴생각 하고 있구나.” 그때는 몰랐다.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날것을, 그리고 이후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지 스승은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서로의 스승이며 벗이다. 대립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며 갈등 대신 그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한다. 약전과 약용이 서로의 글을 고치고 조언하듯, 창대가 약전에게 투덜대면서도 잡아올건 다 잡아오고 말해줄건 다 해주듯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들의 관계는 그 어떤 대립보다도 팽팽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은 누가 옳고 그르냐에 대한 판단으로 흐르는 듯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의 윤동주와 송몽규, ‘박열’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서로 다른 성격의 인물을 연결해 시대극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왔다. 그리고 ‘자산어보’ 역시 이 흐름을 따른다. 누가 맞고 틀린가, 마지막 승리자가 아닌 당장 오늘의, 일년 뒤, 십년 뒤의 나를 떠올려보게 된다.
흑산의 바다는 흑과 백 뿐이지만 아주 섬세하다. 배우들의 표정 변화가 돋보이고, 작은 사물에 집중된다. 화려함 대신 차분한 흡인력으로 관객을 빨아당긴다. 섬 안에서 촬영하며 그때 그들의 삶에 빠져든 듯한 설경구와 변요한의 얼굴, 이들 사이를 어색하지 않게 모서리를 잘 다듬은 듯한 이정은의 합주가 일품이다. 동방우, 정진영, 김의성, 방은진, 류승룡, 조우진, 최원영, 윤경호, 조승연 등의 배우들 역시 낯선 정약전의 삶을 드라마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데 큰 역할을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보고 있자면 편안하고, 보면 볼수록 진한 수묵화처럼 ‘자산어보’의 깊은 농담(濃淡)은 관객에게 할 이야기가 많다. 그 어둡고 환하고 푸르른 감성은 극장에서 보는 것이 옳다. 31일 개봉.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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