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프점프 ‘커튼콜’은…
유명 작가 스티븐 킹은 부고 기사를 쇼가 끝난 뒤 배우들이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인사하는 '커튼콜'에 비유했습니다. 부고 기사는 '죽음'이 계기가 되지만 '삶'을 조명하는 글입니다. 라이프점프의 '커튼콜'은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는 코너입니다.
4월 1일 만우절이다. 꼭 18년 전 이날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리 없는 새 한 마리가 땅에 발을 내딛듯 우리 곁을 떠났다. 유난히 고왔던 얼굴과 달리 우수에 찬 눈빛을 가졌던 그 남자, 장국영이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는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천녀유혼>의 연유이자, <아비정전>의 아비이며, <해피투게더>의 보영이었고, <영웅본색>의 송아걸이었다. 그가 불현듯 우리 곁을 떠난 지 20여년이 다 돼 가지만, 어디선가 마리아 멜레나 노래가 나오면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맘보춤을 추는 그를 떠올리는 것은 장국영 스스로가 우리의 추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울 수 없는 추억 때문에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영화 <아비정전> 中 아비 대사
장국영의 주변 사람들은 ‘사람 장국영’을 내성적이고 예민하며 사람을 좋아했다고 평한다. 그의 이런 성격은 성장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장국영은 1956년 9월 12일 ‘홍콩직물왕’이라 불릴 정도로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돈에 대한 부족함은 모르고 자랐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는 못했다. 가정을 잘 돌보지 않은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들 사이에서 외롭게 자라며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의지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아비는 곧 장국영이었다. <아비정전>의 아비는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비는 바람둥이다. 사랑을 믿지는 않지만 사랑이 필요한 인물이다. 어쩌면 여자들에게서 떠나버린 어머니를 대신 할 모성애를 바랬던 듯하다. 그러다 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버림 받는게 무서워 자신이 먼저 헤어짐을 고하는 게 아비다. 이런 그의 과거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쓸쓸한 관계를 맺게 한다. 장국영은 아비를 연기하며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사람 장국영은 자신의 생각을 꾸미지 않는 편이었다. 가감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의 성격은 다양한 구설수를 가져왔다. 실제로 오랫동안 장국영과 함께 일한 매니저 진숙분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며, 장국영의 솔직한 성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다양한 작품 활동을 같이 하며 친해진 배우 진백강과 토크쇼에 같이 출현했을 때 일이다. 그때 진백강이 자신의 피부에 대한 질문에 “타고난 피부”라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장국영이 “매일 피부를 위해 케어받고 화장도 잘한다”고 말해 둘의 사이가 틀어지게 됐다. 이 일로 둘은 영화 <성탄쾌락>을 촬영할 당시 한 컷도 같이 찍지 않았다고 한다.
“단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싫으시다면 나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아비정전> 中 아비 대사
우리에게 배우로 너무나 잘 알려진 장국영의 시작은 가수였다. 1977년 아시아 가요제에 참가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인 것. 이후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대중의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렇게 7년간의 무명생활이 이어지고 1983년 소속사를 바꾼 뒤 ‘풍계속취’를 발표하며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장국영은 1984년
1980년부터 1990년대의 중화권 3대 가왕에 알란 탐, 매염방과 함께 꼽힐 정도로 홍콩에서 가수로서 성공한 그였지만 상 복은 없었다. ‘풍계속취’로 큰 인기를 얻었으나, 그해 우리나라의 ‘10대 가요제’와 같은 홍콩의 10대 경가금속 시상식에서 11위를 해 상을 타지 못한 것. 가수 최고의 명예인 금침상도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지 한 참이 지난 1999년이 돼서야 받았다.
이렇게 애착을 갖은 직업이었지만, 1990년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싸우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을 발단으로 장국영은 가수로서의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물론 은퇴를 선언한 뒤에도 가수 활동을 이어갔지만 말이다.
“한 번 웃으면 온세상 봄이요, 한 번 훌쩍이면 만고에 수심이 가득하구나”
영화 <패왕별희> 中 두지 대사
우리는 배우 장국영을 다양한 배역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배우로서 장국영의 필모그래피는 컬러풀하다. 이중 지금의 장국영을 있게 한 영화를 굳이 꼽자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일 것이다. 1986년과 1987년 각각 두 영화가 개봉하며 장국영은 배우로서 인정받게 된다. 특히 장국영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청년 이미지는 <천녀유혼>의 영채신과 꼭 맞았다. 극 중 영채신의 겁 많고 순박한 도련님 이미지는 이후 <아비정전>의 아비와 <해피투게더>의 보영으로 이어져 배우 장국영의 이미지가 되어 우리의 뇌리에 각인됐다.
장국영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1990년 다시 복귀하면서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보다는 작가주의 색이 짙은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그렇게 만난 작품이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다.
왕가위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 항상 장국영을 주연으로 생각하고 집필한다고 밝힐 정도로 그는 왕가위의 페르소나였다. 영화 <해피투게더> 역시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의 시점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려 했지만, 장국영의 콘서트 일정과 맞지 않아 부득이 주연이 바뀌게 된 것. 영화 <중경삼림>의 양조위 역할도 장국영을 생각하며 집필했다고 한다. 당연히 장국영에게 제일 먼저 캐스팅 제의가 갔지만, 당시 장국영은 영화<금지옥엽>을 촬영 중이어서 왕가위 감독의 직접적인 제안에도 결국 영화<중경삼림>을 고사했다. 이 영화를 거절한 것에 대해 장국영이 이후 후회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팬으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재앙은 스스로가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서는거야.”
영화 <패왕별희> 中 두지 대사
비슷한 역할은 맡지 않겠다는 배우로서의 소신을 지키며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던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죽기 전 작성했다는 유서도 짧게 공개됐을 뿐 전문은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아 그의 죽음에 대한 가시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가 우리 곁에 없다는 점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쯤 벚꽃이 떨어지듯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우리의 추억 속에 남게 됐다.
“발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때지.”
영화 <아비정전> 中 아비의 대사
/정혜선 기자 doer0125@lifejum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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