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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어린 왕자’가 오다

■고종석 작가, 번역본 출간

국내 나온 번역본만 100여종

번역가엔 갈증·도전의 영역

고종석 "불어 구조에 가깝게 써

낯설게 다가 올 수도 있지만

불어 특유의 감각 최대한 살려"

어린 왕자(고종석 옮김, 삼인 펴냄)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른들에게 특별히 헌정 된 책이 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1943년 4월 미국에서 첫 출간된 이래 250여 개 언어로 번역돼 기독교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언어로 소개된 책이다. 당연히 한국어로도 옮겨졌다. 첫 한국어판은 1960년 안응렬 전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번역본. 이후 내로라 하는 프랑스어 번역가들이 연이어 ‘어린 왕자’에 도전했고, 2015년 책의 저작권이 소멸된 이후로는 더 많은 국내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 번역 시장에 뛰어 들었다. 정확히 셀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국내에 출간된 어린 왕자 번역본은 1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죽하면 번역본 수 만큼의 어린 왕자가 존재한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 지난 해에는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 된 ‘애린 왕자(최현애 옮김, 이팝 펴냄)’가 출간 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애린 왕자(최현애 옮김, 이팝 펴냄)


왜 이토록 많은 ‘어린 왕자’가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일까. 단지 잘 팔리거나 번역이 쉬어서는 결코 아니다. 프랑스어 학자나 전문 번역가들에게 ‘어린 왕자’는 일종의 갈증과 도전의 영역이다. 2018년 타계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2015년 출판사 열린책들을 통해 ‘어린 왕자’를 내놓으면서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옮긴 이의 말에서 “네 번 고쳐 번역하면서, 한국어 결정판 ‘어린 왕자’를 상재하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번역에 결정판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어른의 언어로 어린이의 세계를 건너가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다”고 소회했다.

어린 왕자(황현산 옮김, 열린책들 펴냄)


또 지난해 문예출판사를 통해 ‘어린 왕자’를 다시 옮긴 원로 불문학자 전성자는 “오래 전의 번역을 읽고 많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 손주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할머니처럼 정성을 다하고 싶었다”고 했다. 열림원을 통해 이 책을 옮겨 낸 번역가 김석희는 “불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어린 왕자’는 가장 번역하고 싶은 작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실은 나도 그랬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린 왕자(전성자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이런 ‘어린 왕자’ 번역에 대한 도전의 대열에 최근 또 한 명이 합류했다. 언론인 출신 작가 고종석이다. 삼인 출판사를 통해 ‘어린 왕자’를 내놓은 고종석은 13일 기자와 만나 “뛰어난 번역 아니지만 ‘다른’ 번역”이라며 “한국어라는 옷을 입은 불어”라고 소개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어린 왕자’를 여러 차례 읽었다”며 “제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읽고 또 읽고 했는데, 코르시카어 번역본을 읽다가 직접 옮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사실 그는 어린 왕자 속 순수한 세계관을 그리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고종석은 “칼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고, 레몽 아롱의 말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면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아편”이라며 “나 역시 그래서 어린 왕자의 세계관을 맞갖잖아 하면서도 거듭 읽어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한국어판 ‘어린 왕자’가 아닌 내 한국어판 ‘어린 왕자’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어린 왕자'를 번역한 고종석./사진제공=삼인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공부한 언어학자이기도 한 그는 기존 번역본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기존 번역본이 도착어인 한국어를 중심에 둔 것과 달리 출발어인 불어를 더 중시했다. 또 한국 출판사들이 모종의 합의를 통해 관행적으로 써온 구두점과 문장 부호 등을 하기했고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는 괄호《》나 대화를 표시하는 대시 - 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다들 너무 잊고 있는 거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라고 번역하는 식이다. 어린 왕자의 심리 변화에 맞춰 경어와 평어 사용도 정확하게 반영했다. ‘강들과 바다들’처럼 다소 어색한 복수어도 프랑스어에 맞춰 번역했다. 고종석은 “일종의 문체 실험일 수 도 있다”며 “낯설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어가 가진 특유의 감각을 독자들이 촉지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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