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의 홍차영을 생각하고 ‘낙원의 밤’을 보기 시작했다면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세상 전부를 잃어버린 듯 허무한 얼굴로 나타난 전여빈은 완전히 낯선 인물이 되어 이야기에 스며들었다. 한 손에 총을 들고 세상에 어떠한 미련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방아쇠를 당기는 그의 모습은 왜 그가 ‘연기 괴물’이라 불리는지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전여빈은 ‘낙원의 밤’에서 상대조직의 보스를 살해하고 제주로 피신한 태구(엄태구)를 잠시 보호하는 무기거래상 쿠토(이기영)의 조카 재연을 연기했다. 재연은 굳 죽음을 앞둔 인물로, 살해당한 부모의 복수를 꿈꾸며 권총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태구와, 그 못지않게 최악의 상황에 처한 재연이 조금씩 가까워지며 낙원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피비린내 나는 밤으로 흐른다.
“그냥 평범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가족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목표가 생긴거에요. 그때 충격으로 뇌에 문제가 생겨 시한부를 살게 되고. 자신의 모든 시간을 총 쏘는데 썼을 것 같아요. 폼은 프로와 달라도 눈빛이 중요했는데, 반동과 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학생 시절 홍콩영화와 느와르 영화를 즐겨 봤다는 그는 자신도 주인공처럼 총도 쏘고 전우애도 느끼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재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정통 느와르의 변곡점이 되겠군.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라는 생각에 과감히 도전장을 냈다.
마음먹기는 쉬웠지만,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각이 나오는’ 액션이 아닌 서툴지만 정확히 총을 다룰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총을 쐈을 때는 반동이 너무 커서 놀랐고, 촬영을 마치고 나서는 손가락에 멍도 들고 팔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좋아했다.
“정말 나의 마음이 불타고 있지만, 이 불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한곳으로 응축시켜 에너지를 뿜어내자는 마음이었어요. 집중하다 보면 몸에도 반응이 와요. 손도 떨리고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도 하고. 그리고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에 아무리 울분이 차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정한 일을 완수해야 하니까.”
태구와의 관계는 미묘하다. 분명한건 남녀간의 사랑의 아니다. 그 역시 “감독님께 연애 감정은 아닌 것 같고, 동료애인데 그래도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 규정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맞다고 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태구는 재연에게 누나와 조카를, 재연은 태구에게 나 자신을 투영시켰다. 그리고 호흡은 세밀한 부분까지 잘 맞아 떨어졌다.
“엄태구 선배는 ‘밀정’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처음 만났는데, 간단하게 인사하고 이야기는 못했어요. 다시 만났을 때 ‘죄 많은 소녀’를 보셨다면서 좋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했죠. ‘낙원의 밤’ 캐스팅은 박훈정 감독님의 모험이기에 감사한 마음이 커요. 암묵적으로 정말 좋은 호흡을 주고받자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죠. 감독님과 셋이 맛집도 다니고 카페도 다니며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서로 동료가 됐어요.”
마이사로 등장한 차승원은 강한 카리스마와 동시에 특유의 능글능글함으로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현장에서는 힘들어도 즐거움을 주는 페이스메이커로, 모니터에서는 끝까지 긴장을 이끌어가는 페이스메이커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차승원 선배는 예능과 성격이 똑같으세요. 아는 것도 많으시고, 재미있기도 하고. 현장에 오시면 집중하느라 긴장해 있는 태구 선배나 저를 녹여주시고, 감독님을 웃게 만들어주시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주셨어요. 그러다 또 슛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달라지고. 마이사를 연기하면서도 자신의 재치와 매력이 드러나니까 모니터를 볼 때마다 부러웠어요.”
이 시점에서 전여빈의 팬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은 낯가림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엄태구, ‘빈센조’에 파트너로 출연한 송중기와 연이어 호흡을 맞춘데 대한 느낌이다. 성격이 확실하게 다른 두 배우지만 연기사랑 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이라고.
“두 선배는 성격이 각각 달라요. 공통점이라면 연기에 대한 사랑이 아주 크다는 것.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에 저 역시 잘 해낼 수 있었어요. 저는 옆 사람에게 에너지를 많이 얻는 성격이라, 옆에 있을 때 힘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태구 선배는 응축하는 스타일, 중기 선배는 발산하는 스타일 같아요. 두 선배 모두 집중력이 뛰어나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게 느껴져요. 그런 부분이 자극이 되기도 하죠. 이미 훌륭한데도 더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뎌지지 않고 더 노력하고 싶다는 자극을 받게 돼요.”
‘낙원의 밤’은 물론 ‘빈센조’까지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전여빈은 확실한 주연 배우로 자리잡았다. ‘빈센조’ 막바지 촬영 때문에 3일간 제대로 잠을 못 잤다는 그는 지인들이 자기 주변의 반응을 전달해주는 것을 듣고 화제성을 실감하고 있다. 간접적이지만 예전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봐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낀다. 특히 넷플릭스 덕분에 해외팬이 부쩍 늘었다고.
“인스타그램을 만든지 얼마 안됐는데 해외 팬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팔로워 수가 어마어마해서 이제는 반응의 규모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어요. ‘낙원의 밤’이 유럽 중동 남미 다양한 나라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들었는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