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논리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집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끊기면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죠.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전술 국가에서 전략 국가로 그리고 추격 국가에서 선도 국가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대통령에서 일반 시민까지 이제 모두 한 단계 건너가야 합니다”
철학자의 시선에서 대한민국 세태를 거침 없이 평가하고, 동시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적 방향을 제시해온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정치사회 평론서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북루덴스 펴냄)’를 내놓았다.
서울·부산 시장 보궐 선거가 끝나고 여야 모두 대선을 위한 전열을 시급히 가다듬고 있는 시점에서 책이 출간돼 더욱 관심을 모은다. 출간 시점을 놓고 정치적 해석이 나올 수 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가 책을 낸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큰 선거를 치를 때마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갈등과 혼란, 대립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역사적으로 뒷걸음질치곤 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3일 서울경제와 인터뷰에서 “(이제 건너가자고 제안하는 건) 과거를 해결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과거 문제에만 빠져 있지 말자는 뜻”이라며 “현재는 과거 해결 시도조차도 진영의 시각에서만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에서 ‘역사’를 ‘과거’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는 개념”이라며 “과거 문제는 현재의 시각이 아니라 미래 발전의 시각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대표적인 사례로 친일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지적했다. 그는 “친일 문제를 왜 극복해야 하는가, 해결이 안되면 어떤 문제가 있고, 해결을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 가 등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로지 진영의 시각으로만 접근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친일 문제 해결은 외세에 대한 종속성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독립이 습관 된 나라의 정치는 사실에 의존하지만 종속성이 팽배한 나라의 정치는 도덕에 붙잡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민주화 운동’을 우리 사회가 계승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최 교수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던 건 오직 더 민주적인 사회, 더 자유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며 “5.18 역사 왜곡을 처벌할 수 있는 현행법이 있는데도 왜 특별법을 만드나. 친일 청산도, 5·18 민주화 운동도 더 나은 나라가 되는 방향으로 승화 되어야지 선택적 한풀이에 이용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우리 사회가 쉽게 진영 논리에 빠지거나 생각보다 감정에 치우치게 되는 이유로 “국가와 민족 개념을 쉽게 혼돈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선 집권 세력부터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며 “책에서도 분명히 언급했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어도 친일을 했으면 평가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공격했더라도 반일을 했으면 평가하는 건 민족 관념으로 보면 옳을 지 몰라도 국가 관념에선 그릇 된 것”이라며 “현 정권의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취임할 때 헌법을 수호한다고 선서한다. 그 헌법은 한민족 헌법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영토를 수호하는 일을 헌법대로 하는 사람이지 시민 단체 대표가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헌법 정신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가적 아젠다 부재도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승만 정권 때는 ‘건국’, 박정희 정권 때는 ‘산업화’, 김영삼·김대중 정권 때는 ‘민주화’라는 국가 아젠다가 작동했다” “아젠다가 있을 경우에는 서로 관점이 다르더라도 ‘다름’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젠다 자체가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그런 점에서 차기 대통령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아젠다 설정”이라며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아젠다를 설정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시민 개개인에게도 생각의 힘, 즉 독립적 사고 능력 제고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독립적 사고 능력을 갖추면 자신의 생각을 세상 변화에 맞춰 바꿔갈 수 있지만 그런 능력이 없으면 한번 받아들인 걸 종교처럼 믿게 된다”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 계속 던질 수 있어야 더 발전 된 존재, 다음 단계로 건너 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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