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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논단] 대통령의 신념과 역할

손병권 중앙대 교수·정치학

정치인 행동 이끄는 동력이지만

대통령직, 신념만으로 성공 못해

국민·시대가 기대하는 역할 파악

공공선 추구하며 미래 설계해야

손병권 중앙대 교수




신념이 없는 정치인은 있을 수 없다. 정치인은 신념을 통해 자기를 훈련하고 그러한 신념을 토대로 정책을 준비하고 국민의 심판을 통해 집권 세력의 구성원이나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정치인에게 신념은 정치적 행동의 가장 중요한 추진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윈스턴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막기 위해 자유 진영이 강력하게 대항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뭉쳐 있었고 샤를 드골은 강력한 대통령 없이 전후 프랑스의 영광은 없다고 확신했다. 박정희는 오매불망 경제 건설과 자주국방에 투철했으며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와 정당의 전국화에 신명을 바쳤다. 이들은 모두 강한 신념으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때로는 고집스러운 소신으로 저항을 이겨내려 했던 인물들이다.

신념은 다양한 경로로 형성된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성장 과정이나 학교의 학습 과정에서 신념이 형성되기도 한다. 종교 생활, 교우 관계, 직장 생활을 통해 이왕의 신념이 강화될 수도 수정될 수도 있다. 정치인의 경우라면 젊은 시절 겪었던 전쟁이나 빈곤, 사회적 차별, 독재에 저항한 의분 등이 축적되면서 신념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로 형성되는 신념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다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신념은 누구나 표준으로 삼아 공부하는 교과서라기보다 각자 스스로 터득해 메모하는 실전용 교본에 가깝다. 이러한 신념은 정치인의 경우 성격과 결부돼 인격의 내면에서 외부를 향해 행동을 촉구하는 기폭제가 된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인의 신념은, 특히 최고 위정자의 신념은 사회를 극도로 분열시키기도 하고 아예 나락으로 내몰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왜곡된 백인 민족주의가 그런 종류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환경을 통해 신념은 부단히 검증돼야 한다. 정치인이 지닌 신념의 오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장치로서 우리는 위정자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보는 ‘역할’ 인식을 유심히 봐야 한다. 위정자의 신념은 위정자 스스로 자신을 엄중하게 돌아보는 역할 인식에 의해 정제돼야 한다. 그런데 왠지 민주화 이후 이러한 역할 인식의 비중과 중요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역할이란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내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능과 실천의 총합이다. 신념이 주관적이라면 역할 인식은 객관적이다. 신념이 동적이고 자유분방한 것이라면 역할 인식은 정적이고 자기 성찰적이다. 역할 인식은 내가 맡은 지위와 이를 규정하는 각종 관행과 규정이 내게 부과하는 제한 요소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념으로 뭉친 자아(ego)를 수수방관하지 않고 이것이 늘 각성된 상태로 있게끔 촉구하는 초자아(super-ego)가 역할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은 대선이라는 난관을 뚫고 들어온 신념의 인물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신념만으로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국민과 헌법과 동시대가 기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공공선을 추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의 후보로 공천받아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정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대통령이 되면 이에 못지않게 행정과 국가 정책의 최고 결정자로서 국리민복을 항상 염두에 둬야만 한다. 그래서 대통령은 신념과 함께 지금 자신이 수행해야 마땅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현명하게 판단하는 지혜와 경륜, 그리고 각종 역할을 조정하고 배합할 줄 아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만 남겨두고 여야 지도부가 새로 정비되면서 이제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드는 형국이다. 계파와 지역과 정당이 합종연횡을 하면서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고 일상의 국민은 기대감 속에서 이를 관전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매우 분열돼 있고 또 갈 길이 먼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역할을 신념의 렌즈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대통령의 역할에 맞춰 볼 줄도 아는 그런 인물이 대통령으로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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