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총선 압승 이후 더 강화됐던 청와대의 일방통행 식 인사가 지난 4·7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 사실상 첫 제동이 걸렸다. 배우자의 영국산 도자기 밀반입으로 논란을 빚었던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가 청와대와의 소통 후 자진 사퇴한 것이다. 다만 박 후보자의 살신성인(?) 이후 여당과 청와대는 김부겸 국무총리,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은 속전속결로 통과·임명시키며 야당과 충돌을 빚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황보승희 국민의힘 의원은 김정숙 여사가 임혜숙 장관 임명 강행에 배후 역할을 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황보 의원의 근거 없는 공세는 외려 여진이 이어지던 현 정부의 마지막 인사 논란 ‘1차전’을 상당 부분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준영 결국 사퇴…국회 반발에 한발 물러선 文
박준영 후보자는 13일 서면 입장문을 통해 전격 사퇴 입장을 밝혔다. 박 후보자는 입장문에서 “공직 후보자로서의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며 “내 문제가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해양수산부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세간에서는 박 후보자의 이 같은 결정에 임명권자인 문 대통령의 의중이 과연 반영된 게 맞느냐는 의문 부호가 붙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4주년 기자회견 때만 해도 “야당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검증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박 후보자에 대해 “해운강국의 위상을 되찾는 역할에 최고의 능력가”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게다가 다음 날인 11일에도 논란이 된 임혜숙·노형욱·박준영 후보자에 대한 인사 청문 경과 보고서를 14일까지 재송부해 달라고 국회에 요청해 인사 강행 의지를 우회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만약 14일까지 인사 청문 경과 보고서가 청와대에 제출되지 않을 경우 문 대통령은 15일부터 세 후보자를 임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억측이었다. 청와대는 곧바로 박 후보자 사퇴 전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같은 날 기자들과 만나 “청와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박 후보자가 결론을 내렸다”며 “지난 주말쯤에 여당의 의견을 수렴했고 대통령도 여론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 후보자 사퇴 과정에 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됐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는 문 대통령이 여야 반발에 한발 물러섰음을 의미하는 얘기이기도 했다. 임혜숙·노형욱·박준영 후보자 임명 강행에 대해서는 송영길 대표 등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중진·초선의원들까지 우려를 나타냈던 참이었다.
與 김부겸·임혜숙·노형욱 단독 처리...靑 속전속결 임명
그러나 여당과 청와대는 박 후보자 사퇴를 계기로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 동의안을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임혜숙·노형욱 두 장관 후보자의 인사 청문 경과 보고서 채택도 강행했다. 13일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협치의 국회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국민의힘은 끝까지 버티기 뿐이었다”며 “야당의 비협조로 인해 길어지는 국정 공백을 더는 방치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국회 로텐더홀에서 민주당 규탄 시위를 열고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가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현장에서 또 한번 눈물을 삼키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이 문재인 정권의 잘못된 인사, 오만한 인사에 대해 반드시 기억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간곡하게 호소드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 대통령 역시 다음 날인 14일 오전 김 총리와 두 장관 임명을 마쳤다. 국정 공백을 최대한 빨리 메우겠다는 의지였다. 문 대통령은 이날 김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김 총리 중심으로 마지막 1년을 결속력을 높여 단합해 달라”며 “코로나19라는 사회적 재난을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 총리도 “장관님들, 우리 함께 열심히 하자”고 외쳤다.
임 장관은 아파트 다운계약, 위장전입 등 자신을 둘러싼 도덕성 논란을 의식한 듯 “청문회를 거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소통하고 협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노 장관은 “부동산 시장 안정과 투기 근절이 최우선 과제”라며 “정부의 공급 대책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황보승희 “임혜숙 임명 뒤 김정숙 여사 있다는 얘기 있어”
이날 문 대통령의 임명 강행에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특히 비판의 화살은 임혜숙 장관을 집중 겨냥했다. 14일 청와대 앞 긴급 의원총회에서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은 “도대체 이분이 어떻게 여성을 대표할 수 있나”라고 따졌고, 배현진 의원은 “무려 4년간 ‘협치하라’, ‘독주하지 말라’ 하는데도 대통령은 그 외침을 듣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윤희숙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여자 후보자 찾기가 힘드니 국민 눈높이에 미달해도 그냥 임명시키자는 말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이 정부는 페미니즘을 외치기만 할 뿐, 믿는 바도 추구하는 바도 없는 꼰대마초에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같은 당 황보승희 의원이 같은 날 낸 ‘보도자료’에서 불거졌다. 황보 의원은 이날 공식 보도자료에서 “임 장관 임명 강행 뒤에는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며 “인사권도 없는 영부인이 추천해서 장관이 될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자기 관리를 하고 역량을 키우려고 하겠는가”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 여사가 임 장관 인사에 개입했다는 근거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황보 의원은 이후에도 언론 등을 통해 김 여사 배후설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대지 못했다.
이는 곧바로 청와대와 여당에 역공의 빌미를 준 셈이 됐다. ‘뜬소문’ 식의 주장을 성급하게 보도자료로까지 배포하면서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듯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정만호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날 기자들에게 이례적으로 공개 메시지를 보내 “근거 없는 의혹 제기를 한 것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며 “제1야당 국회의원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경고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윤건영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처음 언론 보도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며 “대통령에 대한 비상식적 공격을 일삼다 보니 헛발질을 제대로 했다”고 꼬집었다.
한준호 민주당 대변인은 16일 서면 브리핑을 내고 “(황보 의원은) 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마녀사냥을 하더니 이번에는 영부인을 끌어들여 생뚱맞은 의혹을 제기했다”며 “국민의힘과 황보 의원은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정중한 사과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황보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야당 내에서도 옹호하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철희 “아주 구태정치”…김오수 인사 ‘2차전’ 예고
황보 의원의 주장을 두고는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까지 비판 대열에 합세했다. 이 수석은 17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관련 의혹 제기를 두고 “굉장히 악의적 의혹이라고 본다. 아주 구태정치라고 본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수석은 “최소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주장을 해야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주장을 하면 세상에 그런 루머나 의혹에 견뎌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굉장히 잘못된 행태이고, 특히 인사와 관련한 이런 문제 제기는 반드시 근절돼야 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황보 의원의 김 여사 배후설 제기가 역설적으로 임 장관에 대한 야당 공세를 위축시킨 게 아니냐는 평가도 내놓았다. 여진은 물론 이어졌지만 그 동력을 크게 떨어뜨린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임 장관 논란과 별도로 오는 26일 예정된 김오수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그에 대한 임명 강행 여부는 이번 인사 논란의 사실상 ‘2차전’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검찰 문제는 이번 정부 내내 최대 이슈였던 만큼 김 후보자를 둘러싼 공방은 정국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문 대통령은 10일 기자회견에서 “김오수 후보자가 법무부 차관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반응했다.
아시아경제가 윈지코리아컨설팅에 의뢰해 지난 15~16일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1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김 총리와 임 장관, 노 장관 임명을 강행한 것에 대해 응답자의 53.7%는 ‘여야 합의 없는 임명이므로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대통령 고유권한인 인사권의 행사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본다’는 응답 비율은 38.4%에 그쳤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이번 인사가 부적절했다는 비율이 높았다. 세대별로는 30·40대에서만 찬성 비율이 높았고, 그 외 모든 세대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더 컸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