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초대 우승자에서 가수와 연기자로, 서인국의 12년은 다채로웠다. ‘가수 출신 배우’로 시작했지만, 묵묵하고 진지하게 연기의 길을 걸어온 끝에 가수와 배우 모두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충무로 스토리텔러 유하 감독이 권상우, 조인성, 이민호에 이어 그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인국은 오는 26일 개봉하는 유하 감독의 신작 영화 ‘파이프라인’에서 손만 대면 대박을 터트리는 도유 업계 최고 천공기술자 핀돌이 역을 맡았다. 인생 역전을 꿈꾸는 핀돌이는 수천억의 기름을 빼돌리기 위해 거대한 판을 짠 대기업 후계자 건우(이수혁)의 제안으로 인해 위험천만한 도유 작전에 합류한다.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을 만나 좌충우돌 팀플레이를 펼치는 과정이 블랙코미디로 담겼다. 서인국은 유 감독의 부름으로 8년 만에 스크린에 컴백할 수 있었다.
“그동안 드라마에 집중했던 건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8년 만에 영화가 나와서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동안 했던 드라마 캐릭터와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하게 된 거죠. 유하 감독님과는 다른 작품으로 먼저 만나게 됐는데 어떤 사정으로 인해 지연이 됐어요. 감독님이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다. 이 작품(‘파이프라인’)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해주셨고, 핀돌이가 재밌고 매력 있는 캐릭터라서 하게 됐어요.”
유 감독의 서인국 사랑은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알려졌다. 당시 유 감독은 “나는 꽃미남이 아니면 안 좋아하기 때문에 (서인국에게) 큰 관심은 없었는데, 딱 보자마자 매료됐다”며 서인국의 다채로운 이미지와 연기를 대하는 태도를 극찬했다. 하지만 정작 서인국은 유 감독이 이전에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이 외모와 연기 실력이 모두 출중한 이들이기에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이 매우 놀라웠다.
“유 감독님은 저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또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셨는지 사실 잘 모르겠는데, 예뻐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어요. 현장에서는 ‘디렉팅을 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이야기한 의도대로 바로바로 해줘서 재밌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유 감독님이 저 같은 배우랑 작업하고 싶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죠.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하자’고 자주 말씀해 주셔서 무조건 영광이고, 또 같이 하고 싶어요.”(웃음)
유 감독이 서인국에게 맡긴 핀돌이 캐릭터는 드릴로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는 천공 기술자로, 업계에서 전설처럼 불리는 천재 도유꾼이다. 조금 거칠지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고, 도유꾼 같지 않은 깔끔한 외모로 완벽한 위장술까지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다. 서인국은 이런 핀돌이의 매력에 빠져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다.
“핀돌이의 매력은 민첩성이에요. 특유의 유머스러움과 빠른 두뇌회전으로 모든 일을 빨리 헤쳐 나가요. 보통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핀돌이는 이미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헤쳐 나가는 느낌이에요. 위기가 올 수도 있는데 거기에 책임을 지는 게 매력적이죠. 핀돌이 같은 사람을 실제로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세팅되어 있는 걸 뚫고 사라지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위아래도 없고 ‘당신들은 대체 가능하고 나는 대체 불가능’이라는 말도 하는데, 예의 없고 거칠면서도 팀과 함께하면서 정이 생겨가는 모습이 끌리더라고요.”
‘파이프라인’이 범죄 오락 영화인만큼 액션도 많았다. 그는 밧줄에 묶여 있는 장면에서 악바리처럼 고통을 참고 줄을 끊고 나가려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 온몸으로 연기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온몸에 압력을 많이 받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기도 하고, 왼쪽 손이 마비되기도 했다. 이외 액션 신에서도 분노 같은 깊은 감정들을 이끌어내며 새로운 모습과 표현들을 익힐 수 있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막장 안에 있는 캐릭터들이 고통스러워하고 고생하다가, 다시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같이 호흡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숨이 막혀오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어떤 기점으로 상황이 역전되면서 통쾌한 부분이 있으니 그 부분들을 재밌게 봐주셨으면 해요.”
서인국의 필모그래피를 아는 이들이라면 ‘파이프라인’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수혁과의 재회다. 2014년 드라마 ‘고교처세왕’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은 ‘파이프라인’을 통해, 그리고 현재 방송 중인 tvN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로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주요 배역을 맡은 두 배우가 같은 작품에 세 번이나 만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부담이 있을 수 있지만, 서인국은 마음이 편하기만 했다.
“‘파이프라인’을 찍을 때 많이 친해져서 편했어요. ‘대립된 역할인데 친해져서 불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 표정만 보고 이해하는 사이가 됐죠. 어떤 걸 원하고 어떤 걸 고민하고 있다는 게 바로 캐치가 되니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베스트 신을 만들 수 있었어요. 서로 의지하면서 촬영했어요.”
서인국은 2009년 가수 데뷔 후,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가수보다 배우로 활동한 시간이 더 길어진 그는 어느덧 13편의 드라마와 2편의 영화 필모그래피가 쌓였다. ‘파이프라인’은 배우로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준 뿌듯한 작품이다.
“유 감독님과 핀돌이를 만나면서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됐어요. 큰 무기가 생겨서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또 다른 어떤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게는 큰 의미이고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배우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작품에 등장했을 때 전작의 서인국 캐릭터나 인간 서인국의 모습이 안 비춰지고, 오롯이 그 작품의 캐릭터로 보이는 것이에요. 앞으로는 핀돌이처럼 사람 냄새나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요. 저는 소주 냄새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조금 더 자유로워지더라고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배우로서 열일하고 있는 서인국이지만 가수로서 본분도 잊고 있지 않다. 항상 음악 활동에 대한 계획도 하고 있고, 최근에는 ‘멸망’ OST에도 직접 참여했다. 음악 작업을 활발히 하고 싶어서 개인 작업실까지 차렸다.
“음악과 연기는 서로 도움을 주는 부분도 많아서 굉장히 즐거워요. 노래 녹음을 할 때는 감정적인 부분을 키우기 위해 극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작업했는데, 연기를 할 때는 녹음할 때 상상했던 것들이 많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노래가 주는 공감대가 크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제가 가수 데뷔하고 정규 앨범을 내지 못했거든요. 정규 앨범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작업해서 제 음악을 기다려준 분들에게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인간 서인국은 그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소소한 것에 행복감을 갖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어느 순간 제가 작은 것에 무뎌진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가 어딘가 고장이 났나? 감정이 메말라 가나?’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요. 사실 겁이 많이 났죠. 그래도 스스로 그걸 눈치챘다는 것은 아직 고장 나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도 많이 하고, 영화를 많이 봤어요. 사람들과 소통하고 행복감을 갖는 게 삶의 소소한 목표가 됐어요.”
/추승현 기자 chush@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