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뒤 맑은 하늘을 드러낸 지난 28일 오후. 서울 금천고등학교 진로활동실에는 5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홀로코스트와 과거사 청산’을 주제로 한 특별 강좌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총 3회로 구성된 강의 중 마지막 시간으로 나치시대에 대한 유럽의 청산작업이 어떻게 진행됐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다소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두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강의를 맡은 김선아 이화여대 사학과 강사(문학 박사)는 “과거 청산은 특정 인물에 대한 무차별적 처벌이 아닌 ‘기억, 애도, 슬픔’이 담겨있어야 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유럽의 나치시대에 대한 청산작업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1948)부터 시작해 유럽에서 일어난 과거 청산 작업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치청산 재판이 열린 뉘른베르크는 히틀러 집권시기에 나치 정당대회가 열렸던 곳이어서 장소가 주는 의미도 크다.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에서 재판장과 수석 판사를 맡아 나치시대에 유대인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수뇌부 24명에게 교수형, 종신형 등의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은 역사상 처음으로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범죄 규정을 내리고 전쟁 범죄의 책임을 개인에게도 물었다는 점, 무엇보다도 나치집단의 행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반면 전쟁 범죄에 관한 처벌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급 적용됐다는 점에서 죄형법정주의 위배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 전쟁 중 독일 도시를 무차별 공격한 연합국에 대한 처벌은 없는 승자의 재판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 재판에 대해 초기 독일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후 각 지역에서 과거 청산 재판이 계속되면서 독일인들은 피로감을 느꼈다. 1946년 이후 독일 일부에서는 전범 두둔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김 박사는 “이렇게 독일인들은 과거청산을 서랍 깊은 곳에 넣고 닫아버린 것 같았지만 1960년대 다시 나치 범죄에 대한 처벌이 수면위로 올라왔다”며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재판을 시작으로 홀로코스트 관련 재판이 90년대까지 지속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은 사례를 설명하며 “브란트 총리의 이 같은 행동에 전 세계인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는데 이는 총리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도 벨디브 동계 경륜장에 유대인을 수용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몬 ‘벨디브 사건’에 대해 인정하지 않다가 199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고척도서관이 마련한 김 박사의 ‘역사와 마주하기: 홀로코스트와 과거사 청산’ 강좌는 ‘고인돌2.0(고전·인문아카데미2.0: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최됐다. ‘고인돌2.0’은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과 서울시교육청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 2013년부터 함께한 인문학 교육 사업이다. 성인 중심의 인문학 강좌로 시작한 ‘고인돌’은 지난해부터 명칭을 ‘고인돌2.0’으로 바꾸고 서울 전역의 중·고등학교와 연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역사와 건축, 경제, 과학,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총 56개 강좌로 구성된 올해 제9기 ‘고인돌2.0’은 특히 교과목과의 연계성을 높여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원격 강의 등 비대면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강의를 마무리 하며 김 박사는 “여러분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조용히 듣던 학생들은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김 박사는 “여러분들의 생각처럼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해 잘못은 무한 반복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없다”며 “역사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이날 강의를 마쳤다.
강의에 참석한 금천고 3학년 박소연 양은 “다른 나라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김현정 금천고 사서교사는 “홀로코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데 꼭 필요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며 “강사의 쉬운 설명으로 학생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고인돌 2.0은 올 11월까지 80여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들의 인문학의 사고를 높이기 위한 강연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 이효정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원 hj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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