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에서 태어난 이민자 출신입니다. ‘진짜 미국인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듣고 자랐지만 진짜 미국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아메리칸 드림’이고 나는 진짜 미국 외교관입니다.”
한국에서 5세 때 가족을 따라 미국에 건너온 소녀가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차별을 딛고 25년간의 외교관 경력을 쌓은 끝에 마침내 미 행정부의 스리랑카 대사직에 지명됐다. 이민자 성공 스토리를 쓴 주인공은 한국계인 줄리 지윤 정(사진) 국무부 서반구 차관보 대행.
백악관은 15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정 대행을 스리랑카 대사로 낙점하는 등 9개 지역 대사를 지명했다고 밝혔다.
정 지명자는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학사, 컬럼비아대에서 석사를 취득한 뒤 지난 1996년 외교관으로 입문했다. 태국 주재 경제참사관, 캄보디아 주재 미대사관 차석대사, 국무부 일본과장 등을 역임했고 서반구 담당 수석 부차관보를 지냈다. 한국어와 일본어·스페인어·캄보디아어까지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행정부 때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담당하는 등 굵직굵직한 사안을 다룬 외교관으로 이름을 알렸다.
정 지명자의 외교관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워야 했다.
지난해 9월 미국외교관협회(AFSA)가 발행하는 외교저널(FSJ) 기고에서 그는 “고위 간부로 참석한 한 회의에서 한 백인 고위 공무원이 나에게 ‘작은 아가씨’라고 부른 적이 있다”며 “외교관 신분이면서도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여성과 소수민족이 몇 명 참석했는지 무의식적으로 세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국무부 한국과에 근무하던 2002년 방북 때 북한 관리들이 회담장에서 그에게 한국어로 “진짜 미국인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북한 출신이며 한국전쟁 때 월남했고, 그 손녀가 북한이 ‘제국주의’라 부르는 미국 외교관임을 그들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고 소개했다.
어릴 때 중국인으로 오해받으며 자란 그는 ‘진짜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에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답이 충분하지 않으면 주저 없이 가족 이민사를 꺼냈다. 이민 초기 부친은 엔지니어링 회사 공장에서 시간당 4달러를 받고 일하다가 이제는 그 회사의 대표가 됐으며 어머니는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접시를 닦다가 지금 도서관 사서가 됐다고 소개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왕따’를 딛고 당당히 외교관이 된 그에게 그의 부모는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하지 말라’고 격려했다고 전했다.
정 지명자는 또 자신의 기고문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미국 외교의 힘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 지명자를 비롯해 현직 미국 대사 중 한국계로는 성 김 인도네시아 대사와 유리 김 알바니아 대사가 있다. 성 김 대사는 지난달 대북특별대표로 지명돼 중책을 맡았고 유리 김 대사는 바이든 정부의 주한 미국대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박현욱 기자 hw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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