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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언캐니 밸리]실력보단 인맥, 여자보단 남자…실리콘밸리의 배신

애나 위너 지음, 카라칼 펴냄

겉으로는 '평등·열정'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줄서기·성차별' 만연

MZ세대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한

테크 산업의 '비인간적 민낯' 고발





기발한 아이디어를 따라 거대 자본이 찾아오는 곳, 기성 세대가 만들어 놓은 견고한 진입 장벽이 작동하지 않는 곳, 새로운 도전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곳….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갈 곳 몰라 방황하던 밀레니얼 청년들을 설레게 했다. 뉴욕 출판사에서 일하던 이십 대 중반의 애나 위너 역시 실리콘밸리의 유혹에 흔들렸다. 그 실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도 했지만, 기회의 도시라는 생각을 떨치긴 힘들었다. 마크 저커버그처럼 청년 부자가 되고 싶다는 대단한 야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곳에선 청년에게 절실한 ‘미래’나 ‘희망’ 같은 단어를 마음껏 품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뉴욕을 뒤로 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실리콘밸리의 일원이 됐다. 몇 년 후 실리콘밸리를 등진 위너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기이한 세계였고,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였다.”

신간 ‘언캐니 밸리’는 미국 주간 ‘뉴요커’의 정기 기고자이자 실리콘밸리 비개발자 출신인 위너의 실리콘밸리 회고록이다. 책 제목인 ‘언캐니 밸리’는 인간을 닮아가는 로봇에 대한 인간의 감정이 호감에서 비호감으로 바뀌게 되는 지점을 뜻하는 용어다. 책은 지난 해 미국에서 출간돼 크게 회자됐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포브스 등 30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인사나 기업의 성공 사례를 다룬 흔한 책들과 달리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자본주의적 모순과 그 안에 놓인 지식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테크 산업의 비인간적 면모를 고발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인간적 고통을 들여다보고, 한 청년의 성장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책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저자는 인문학 전공자로 대학 졸업 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급변하는 세상과 동떨어진 일이었고, 급여도 적었다. 부모의 지원 없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친 친구들의 삶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미래는 불안했고,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저자는 전자책 스타트업에 우연한 기회로 합류한다. 큰 돈을 투자 받은 20대 청년들이 커다란 사무실을 쉽게 구하고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뉴욕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모습은 기이하게 여겨졌다. 출판에 대한 이해나 애정 없이 책과 테크를 연결하려는 것이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전자책 스타트업과의 짧은 인연은 그가 실리콘밸리로 향하게 되는 발판이 됐다. ‘기회의 도시’로 찾아간 위너는 후일 크게 성공하는 스타트업 두 곳에서 비개발자로 일하며 살게 된다. 하지만 삶은 애초 기대와 달리 고단했다. 더 잘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모순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위너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넘쳐 나는 유동성에 힘입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실리콘밸리의 풍경을 정교한 관찰과 풍부한 감상, 섬세한 문체로 기록했다. 실리콘밸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테크인과 비테크인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진보와 자율을 미덕으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극도의 능력주의와 효율성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곳이었다. 작은 스타트업에서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젊은 창업자나 CEO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뒤로는 인맥과 줄서기가 만연해 있었다. 윤리에 대한 고민도 부족했다. 실리콘밸리가 만드는 첨단 기술이 감시 산업의 기반이라는 비판이 외부에서 거세졌지만 실리콘밸리 내부에서는 이 같은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성 차별도 흔했다.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인력 비율이 극도로 낮았고, 작은 사무실 안에는 여성 혐오가 난무했다. 하지만 이를 제어할 장치는 없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조롱 받거나 소모품 취급을 받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하지만 저자는 그 상황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는 반복되는 자책으로 이어졌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쓸모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업무에 ‘영혼까지 갈아 넣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의 일과 삶을 무조건 비판만 하지는 않는다. 책에는 실리콘밸리 테크의 세계가 조금만 더 인간적일 순 없을까, 하는 저자의 애정과 안타까움이 녹아 있다. 책은 4차 산업혁명 기치 아래 기술 만능주의와 능력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날이 인간을 닮아가고 있지만 인간성은 없는 기술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순간, 우리 역시 불쾌한 골짜기를 경험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만8,500원.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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