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구입, 선분양, 택배기사, 층간소음, 경비원…. 익숙한 단어들이 낯선 곳에 등장한다. 2021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들 키워드가 등장하는 곳은 신문 사회면이 아니라 가극 무대다. 작곡가 류재준이 기획한 2인 가극 ‘아파트’는 한국 사회의 욕망과 좌절, 갈등이 응축된 공간인 아파트를 중심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6~8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전막 초연을 앞두고 만난 류재준은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어도 우리 삶을 비추고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며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통해 많은 사람이 현실의 조각조각을 짚어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작품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15곡의 가곡과 7곡의 프렐류드로 구성됐다. 성악가는 15개의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로 변신해 1인 다역을 소화한다. 유튜브에 공개된 ‘아파트 구입’ 뮤직비디오는 부동산 과열과 맞물려 이미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높으신 분들은 아파트를 몇 채씩 갖고 있는데 서민 대책을 만들어요.’ 경쾌한 피아노 반주 위에 찰리 채플린으로 분장한 바리톤 김재일의 연기와 무덤덤하게 내뱉는 신랄한 가사가 어우러진 영상은 이전 가곡들과는 분명 결이 다르다. 이 독특한 기획은 “우리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다”는 류재준의 오랜 고민에서 탄생했다. “예술의 역할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잖아요. 평범한 서민들이 듣고 재미있어 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라면 (관객에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군더더기는 다 덜어냈다. ‘2인 가극’ 답게 극의 화자인 성악가 김재일과 피아니스트 김가람 단 두 명이 70분의 무대를 소화한다. 대규모 공연과 스타 아티스트가 주류를 이루는 클래식 음악계에 대한 류재준의 안타까움이 반영된 형식이기도 하다.
백미는 단연 비극적 현실을 풍자적으로 담아낸 음악이다. ‘저 너머 힐스테이트 이 편한 세상 하늘은 푸르지오 미래는 아름답지요. 끼리끼리 살아야지 교양있는 사람들.’(아파트먼트 중)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은 사치죠 눈치 없이 원하면 한방에 잘려요. 감정노동 육체노동 하나도 안 힘들어. 여기서 잘리는 게 더 힘든 일.’(경비원 중) 작사가 문하연과 논의해 완성한 거침없는 가사에는 의도적으로 발랄한 음을 입혔다. 곡의 주제를 반영한 류재준 특유의 장치도 녹아있다. “‘아파트 구입’은 ‘아껴야 살 수 있다’는 내용을 살리려고 음을 네 개만 써 봤어요.(웃음) ‘최저시급’은 음열에 8,590원(2020년 기준)의 숫자를 넣어 곡을 만들었고요.” 이 밖에도 남들 사니 따라 사는 심리를 돌림노래로 표현하는 등 재기발랄한 코드가 곳곳에 숨어있다.
류재준은 클래식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주저 없이 내는 음악가다. 용산 참사의 아픔을 녹여낸 첼로 협주곡, 세월호 희생자 추모곡 등을 발표했고, 이런 행적이 문제(?)가 돼 이전 정권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세간의 시선이 신경 쓰일 법도 하지만 그는 “나는 음악인 이전에 한 명의 시민”이라며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를 ‘광대’라 칭한다.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웃음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다. 류재준은 “힘들 때 버틸 힘을 주는 것이 예술”이라며 “학위와 멋있는 척으로 제아무리 덧칠해도 음악가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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