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샵, 웨스틴조선호텔, SSG마켓, 이마트 피코크, 노브랜드, 띠어리, 슈에무라, 빅토리아시크릿, 세포라, 구글, 갭 애슬레타.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이 브랜드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의 손을 거치며 그 운명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브랜드 미다스의 손’ 이보영 CD다. 그는 현재 99% 여성에 의한, 100% 여성을 위한 브랜드인 갭의 애슬레저 브랜드 ‘애슬레타’의 총괄CD다. 지난 3월 자리를 옮기면서 “지금은 소박해 보이는 애슬레타 브랜드의 성공이 내 커리어의 종착역이 될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2015년 이미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CD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 세포라의 책임CD로 스카우트되며 처음으로 ‘K뷰티’ 캠페인을 기획해 전 세계에 ‘K뷰티’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서구적인 얼굴이 아닌 한국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현해내기 위해 뉴욕의 한국인 사진가 강혜원 씨, 세포라 내 한국인 아트디렉터, 손대식 메이크업 아티스트, 한복을 들고 날아온 김예영 스타일리스트, 한국적 얼굴의 모델 박지혜 등으로 이뤄진 ‘코리안 드림팀’을 구성해 ‘한국 여자들의 고운 피부 비결은 스킨케어’에서 시작한다는 비주얼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창출했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는 색조 화장을 뷰티로 인식했지만 이 캠페인을 통해 ‘진정한 뷰티는 한국 여성들처럼 공들여 하는 스킨케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떠올렸다.
◇CD는 세상의 반응을 담는 스토리텔러=브랜드의 컬러와 비주얼·소통, 디지털과 매장에서의 고객 경험, 커뮤니케이션, 콘텐츠 프로덕트, 광고 캠페인 등을 일관되게 디렉팅하는 브랜드 총괄 감독이 바로 CD다. 그는 브랜드의 철학과 시장이 반응하는 스토리를 입혀 콘셉트를 만들며 브랜드가 나아갈 방향까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읽어내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텔러로서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핵심 가치를 잘 이해하고 이를 문화·경제·사회·트렌드와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기 위해 창의적인 생각의 근육을 만들어내는 팀 조직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이 CD는 덧붙였다.
◇정유경 사장과의 프렌드십이 만들어낸 인생 역전=지금 신세계그룹이 보유한 다양한 브랜드는 인사이트를 가진 정용진·정유경 남매와 이 CD의 합작 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CD의 감각을 일찌감치 발견해 기용한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의 예리한 눈이 없었다면, 또 정용진 부회장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이보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구현되지 않았다면 럭셔리하고 젊은 신세계의 이미지는 물론 SSG마켓·피코크·노브랜드 등도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는 “정유경 사장은 내 인생의 첫 클라이언트였는데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리스크 관리를 잘하고 도전적이며 영감이 뛰어나 배울 점이 많은 친구”라며 극찬했다.
이들의 인연은 로드 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대학 시절 클래스메이트로 시작했다. 졸업 후 런던에 놀러 온 정 사장과 의기 투합해 탄생한 것이 바로 ‘분스파(boon spa)’였다. “영국 왕립 예술학교 대학원에 다닐 당시 의무적으로 개인 스튜디오를 만들어 비즈니스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필수과목을 이수해야 했어요. 이 때 그녀가 제 첫 클라이언트가 된 거죠." ‘기대하지 못했던 기쁨+분을 바르다’에서 영감을 얻은 ‘분(boon)’은 국내 최초의 컨템포러리 디자이너 편집숍인 ‘분더샵’과 주니어 명품 편집숍 ‘분주니어’ 등의 분 시리즈를 낳았다. 분더샵의 성공적인 론칭으로 단숨에 잠재력을 인정받은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조선호텔에서 6개월간 숙식하며 웨스틴조선호텔의 전반적인 브랜딩 리뉴얼을 진행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화 호텔이라는 히스토리를 조선호텔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스토리텔링에 모두 적용해 극찬을 받았다. 덕분에 이 CD는 학업 도중 진행했던 두 가지 프로젝트의 ‘기대하지 못했던 기쁨(boon)’을 실제로 맛보며 미국과 유럽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이보영을 알아본 신세계그룹의 ‘정 남매’=1999년 분스파에서 시작된 신세계와의 인연은 이 CD가 미국에 거주했던 2010년까지 계속됐다. 낮에는 나일론·띠어리·슈에무라·빅토리아시크릿 등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밤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 ‘A+B’의 대표로서 정 사장이 의뢰한 신세계백화점의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는 열정을 쏟아냈다. 정 사장과 정 부회장은 급기야 그를 한국으로 불러냈다. 그는 2010년 12월 39세의 나이에 신세계백화점 브랜드 전략팀의 크리에이티브 총괄상무로 그룹 내 첫 여자 상무 타이틀을 달고 브랜드 전략팀을 처음 구성하고, 혁신적인 생각과 브랜딩이 회사의 문화로 정착될 수 있도록 팀의 크리에이티브한 근육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시니어가 선호하는 백화점 이미지도 탈바꿈시켰다. ‘바겐세일’에 집중했던 국내 백화점 광고의 룰을 깨고 당대 럭셔리 브랜드 화보만 찍는 사진작가 스티븐 마이젤을 기용해 패션 화보를 연상시키는 광고를 선보이며 신세계백화점을 월드 클래스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주효했다. “프라다·LVMH 등 럭셔리 패션 전문 작가 마이젤에게 70쪽이 넘는 제안서를 보냈지만 네 차례 거절당했죠. 다섯 번째 만에 수락을 했는데 딱 5개월이 걸렸어요. 뉴욕과 파리에 소문이 퍼지며 역으로 유명한 패션 광고 작가들이 신세계에 러브콜을 보내오기 시작했죠. 심지어 신세계인터내셔날이 분더샵에 선보일 의류를 바잉하러 갈 때 마이젤의 화보는 글로벌 편집숍에서 ‘프리패스’ 역할을 했다니까요.”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의 작품을 백화점에 들여온 것도, 쇼핑백에 새겨진 ‘S체크’를 탄생시킨 것도 그였다.
2013년부터는 정 부회장과 함께 이마트 브랜드 전략팀에서 ‘피코크’를 론칭했다. 정 부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SSG마켓과 F&B 브랜드 메나쥬리·호무랑·베키아에누보도 ‘이보영 스타일의 브랜딩’을 통해 사람과 재료에 대한 스토리가 있는 브랜드로 탄생했다.
◇대학 중퇴와 함께 스스로 쟁취한 디자이너의 꿈=이 CD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2년 만에 중퇴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소질을 보인 미술 대신 어문 계열을 선택했지만 결국 꿈을 찾아 내린 결단이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어학연수를 위해 날아간 프랑스 현지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한국에서 소위 잘나가던 것을 접고 온 많은 챌린저들을 만난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죠. 2학년 때 휴학을 한 후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다시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어요.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자녀 6명을 낳고 당신이 하고 싶은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한 전력이 있는 친할머니의 지원사격 덕분에 꿈을 이루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어 “처음에는 반대하신 아버지가 나중에는 가장 큰 후원자가 되셨다”면서 “나중에 ‘브리티시 카운실’의 장학금을 받을 때까지 전폭적인 후원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감사함을 쏟아냈다.
아이 둘을 양육하고 있는 워킹맘인 그는 자신의 지난 커리어를 돌아보며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남이 준 벼슬인 인작은 남이 빼앗아갈 수 있지만 하늘이 내려준 직업, 즉 천작(하늘이 부여한 도덕성)은 나의 능력이라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며 “아이들이 자신의 천작을 발견하고 이를 찾아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자신의 교육관을 내비쳤다.
RCA 대학원 시절 첫 클라이언트인 정 사장의 ‘분더샵’ ‘조선호텔’ 브랜딩 프로젝트 이력을 눈여겨본 미국 나일론 매거진의 창립자 마빈 스콧 재럿은 이 CD를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싱크탱크의 팀원으로 채용해 1997년 갓 론칭한 미국 의류 브랜드 띠어리의 브랜딩 프로젝트를 첫 업무로 맡겼다. 그것이 인연이 돼 띠어리의 창립자 앤드루 로젠의 러브콜을 받아 띠어리 패밀리가 된 그는 초창기 멤버로서 띠어리가 커리어우먼을 위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미국의 대표 컨템포러리 브랜드 이미지를 장착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빅토리아시크릿을 거쳐 2005년 로레알그룹으로 몸값을 높여 스카우트된 그는 본격적으로 CD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 CD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이보영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2014년 여성들의 꿈의 놀이터 ‘세포라’에서 총괄CD를 맡으면서다. 만 4년간 정유경·정용진 남매와 호흡을 맞춰온 그는 자신의 크리에이티브 궤적에 세포라를 새로 써넣으며 세계 무대로 다시 나갔다. 세포라 전체 브랜드 광고를 포함해 온·오프라인, e커머스를 지휘하며 ‘K뷰티 캠페인’ ‘렛츠 뷰티 투게더’ ‘세포라 컬렉션’ ‘플레이 바이 세포라’ 등 수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그 과정에서 ‘K뷰티’도 이보영을 만나며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커리어의 마지막 종착지는 ‘잘 나가는 곳’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신세계를 떠날 때도, 여성들이 선망하는 세포라에서 나올 때도 그 결정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국보다 미국의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짐을 꾸렸고,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큰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선망의 직장 세포라도 미련 없이 뒤로했다. 2년간 집에서 아이들 곁을 지키며 개인 비즈니스를 하던 중 구글의 디자인 총괄 아이비 로스가 내민 손을 잡고 세계 첫 구글 스토어 론칭팀의 CD로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혁신과 평등의 대명사로 보이는 구글은 생각보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강해 평소 여성과 인권·스토리를 중시해 온 그에게 매력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올 1월 전 세포라 옴니 소매 담당 수석부사장 메리 베스 로턴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이 CD는 6월 구글 스토어 뉴욕 론칭을 앞두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갭의 애슬레저 브랜드 ‘애슬레타’의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를 옮긴 로턴이 마지막으로 애슬레타에서 뭉치자고 제안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작은 기업 애슬레타는 미국에 200여 개의 매장이 있는 ‘여성을 위한 애슬레저 브랜드’로 CEO를 비롯해 250명의 직원 중 99%가 여성이다. 그렇다 보니 워킹맘끼리 눈빛만 봐도 서로의 사정도, 삶의 패턴도 이해한다. 그는 “신세계그룹 상무 시절 육아에 죄책감이 가득한 여성들만 만났을 뿐 롤모델이 없었다”며 “빅토리아시크릿·세포라 등 여성들이 많은 기업은 엄마가 일하기 좋은 회사였고 애슬레타 역시 여성이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에 최적의 회사”라고 말했다.
여성에 의해, 여성을 위한, 여성의 브랜드 애슬레타가 지난 5년간 펼쳐온 ‘파워 오브 쉬(Power of She)’ 캠페인은 평소 여성의 삶에 대한 생각이 많던 그의 심장을 다시 한 번 뛰게 했다. “제가 세포라를 선택한 것은 여성의 아름다움이 꼭 겉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뷰티에 대한 스토리와 자신감을 담아내는 스토리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구글은 그들의 광고에 휴먼 터치를 담은 스토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람 냄새나는 구글 스토어를 만들고 싶어서 가게 된 거죠. 이제는 애슬레타에서 의욕이 넘치고 야망 있는 땀 흘리는 여성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지금껏 걸어온 20년의 커리어에서 어찌 보면 가장 작은 브랜드인 애슬레타가 그의 인생 마지막 커리어이자 가장 큰 도전이라고 고백하는 이보영 CD. 자신을 선택해주는 기업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애슬레타가 구글이나 세포라처럼 ‘아이코닉한 브랜드’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꿈이다. /심희정 라이프스타일 전문기자 yvett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