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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95> 권력집중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사진에 ‘만세 만만세’ 호칭까지

■신문으로 보는 중국 공산당 100년

지난 1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천안문) 광장에서 진행된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을 보도한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2일자 1면.




중국 공산당의 업무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선전’이다. 공산당은 선전기구를 통해 자신의 뜻을 분명히 알린다. 이것이 민주적이냐 투명하냐를 논할 필요까지는 없다. 선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이나 글은 간과할 수 없는 시사점을 준다. 최근 온라인이 많이 보급됐지만 여전히 신문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중요하게는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있다. 그밖에 신문들도 사실상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는 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선전기구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언론(言論)’이라는 표현 대신 ‘매체(媒體)’로 불린다. 매체는 매개물로, 선전기구의 의사를 잘 전달하는데 방점을 둔다.

중국 신문에서 최고 권력자의 사진이 어떻게 배치됐는지, 그가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어떤 표현들이 사용되느냐는 중국 정치와 사회를 알 수 있는 창이다. 중국에서는 정치가 경제를 압도한다는 점에서도 이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내 신문을 통해 중국 공산당 100주년을 되돌아 봤다.

/글·사진(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홍색중화’의 1931년 12월 11일자 창간호. 193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이 남부 장시성 루이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을 때 나온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의 기관지다. 홍군이 이 근거지에서 밀려 이른바 ‘장정’을 나서면서 1934년 10월 발행이 중단됐다. 발간사에서 “노동자·농민의 국가 성립을 선포한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 이외에 ‘광저우 폭동을 기념’과 ‘일본제국주의의 중국 진공’ 등 기사가 있다.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개최를 알리는 1945년 5월 3일자 신문이다. 이 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을 공산당 최고 수뇌로, 마오쩌둥사상(모택동사상)을 공산당의 공식 영도이념으로 확정했다. 1941년부터 시작된 반대파 숙청 및 개조작업이었던 옌안 정풍운동이 마무리되면서 사실상 ‘마오의 시대’가 열린 회의다. 공교롭게도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 몇달전에 개최됐고 이는 이후 전개되는 국공내전에서 마오의 활동 공간을 넓혀줬다.


1949년 2월 2일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인민일보는 1948년 6월에 창간됐는데 이것은 베이징에서 처음 발행된 ‘북평(베이징)판 창간호’다. 마오쩌둥의 앞서 1월14일의 시국성명이 실려 있다. 그는 국공내전이 공산당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평화공세를 펼쳤는데 이 시국성명에서 전쟁의 신속한 종결, 평화의 실현, 국민정부와의 협상 등 8개안을 제시했다. 아래에 1월31일 ‘고도 북평 해방’이라는 기사도 나와 있다.


1949년 7월 2일자로, 마오쩌둥의 ‘인민민주전정을 논함’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전정’이라는 것은 독재를 의미하는 데 글은 민주와 독재를 교묘하게 엮었다. 부연하자면 ‘대다수 인민에게는 민주를, 소수의 적에게는 독재를’이라는 주장이다. 공산당 일당 통치 체제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공식 선포를 앞두고 발행된 1949년 10월 1일자다. ‘전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마오쩌둥이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출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마오는 중앙인민정부 주석 자격으로 1일 톈안먼(천안문)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공산당 주도의 통일전선기구인 정협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승인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입법기구로 우리의 국회에 해당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1954년에 구성됐다.


1949년 10월 2일자 신문이다. 전날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가 있었고 관련 제반 제도를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마오쩌둥의 사진이 별로 크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앞서 1일자 신문에 ‘마오쩌둥 만세’의 구호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1인독재와 개인숭배는 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1년 5월 28일자는 티베트 관련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은 1950년 10월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했는데 내외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지방정부와 ‘평화해방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는 내용이다. 앞서 3월에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중국군을 피해 인도를 망명했었다. 주더(주덕)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의 사진이 마오쩌둥과 나란히 있다.


1951년 7월 1일자로 중국 공산당 창당 30주년 기념호다. 오른쪽에는 마오쩌둥, 류사오치(유소기), 저우언라이(주은래), 주더의 사진이, 왼쪽에는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조지프 스탈린의 사진이 각각 있다.


1952년 10월 1일자 베이징일보 지면이다. 베이징일보의 창간호라고 적혀 있다. 이날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진에 마오쩌둥과 함께 쑨원(손문·오른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권 초기에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의 후광을 입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 스탈린(호칭은 대원수)의 축전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스탈린은 5개월 후인 이듬해 3월에 사망했다.


1954년 9월 28일자다. 중국 입법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처음 구성돼 1기 회의를 개최하고 마오쩌둥을 국가주석으로 선출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한나라의 ‘국회’가 건국 후 5년 만에 꾸려진 셈이다. 입법기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당시 전인대는 보통선거를 거치지 않았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를 ‘고무도장’ ‘거수기’로 비아냥거린다.


1958년 10월 29일자는 우리나라도 관련돼 있다. 중국이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에 파견됐던 중공군(중국명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완전히 철수했고 베이징 시민이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는 내용이다. 종전은 1953년이지만 중공군은 5년여를 더 머물렀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쟁에 불법 개입한 후 8년여 동안 누적으로 총 290만여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중국 공산당 창당 40주년인 1961년 7월 1일자다. 앞서 30주년에 이어 당시 40주년에도 류샤오치 부주석이 기념식 연설(6월30일)을 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사실상 류샤오치가 후계자로 꼽혔다는 증거다. 하지만 류샤오치는 문화대혁명 와중에 주자파로 몰려 숙청되고 1969년 비참하게 죽는다. 지면에 마오쩌둥의 사진만 단독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이때쯤부터 1인독재와 개인숭배가 강화된 것으로 알 수 있다.


1966년 8월 13일자로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8기 11중전회) 결과를 알리는 ‘공보’다. 8기 11중전회 결정을 통해 이른바 문화대혁명이 본격화됐다. 공보에서는 문혁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경제토대에 조응하지 못하는 모두 상부구조를 개혁한다’는 목적 아래 홍위병 등 광범위한 대중 동원이 방법으로 제시됐다. 이후 중국은 마오쩌둥 사망 때까지 10년 문혁의 동란에 신음했다.


1968년 10월 31일자다.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8기 12중전회) 결과를 알리는 공보다. 이 때는 이미 문화대혁명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고 마오쩌둥 권력도 강화됐다. 신문 지면에 ‘마오쩌둥 어록’이 붙어 있다.


1973년 8월 31일자 중국 공산당 10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0기 1중전회) 공보다. 마오쩌둥이 지면을 독차지하고 마치 ‘황제’처럼 위치하고 있다.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 만세, 만만세’라는 글이 눈에 띈다. ‘만세’로도 부족해 ‘만만세’까지 나갔다. 마오는 겨우 3년 후에 사망한다.


1977년 8월 22일자로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다. 중국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1기 1중전회) 공보다. 마오쩌둥의 후계자인 화궈펑 당 주석의 사진이 지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지면 위에는 마오쩌둥 어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아래 인사를 보면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복귀한 것을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은 문혁때 주자파로 몰려 퇴출 되는 아픔을 겪었다.


1978년 12월 24일자 중국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 결과를 알리는 공보다. 기존의 계급투쟁 노선이 부인되고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노선이 결정됐다. 이른바 ‘개혁개방’으로 시작으로 평가되는 회의다. 권력 구도에서도 마오쩌둥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화궈펑이 점차 물러나고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개방파가 세력을 확대했다.


1981년 7월 1일자로 앞서 6월 27일 중국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 결의’가 게재돼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의 마오쩌둥의 과오에 대해 ‘과오는 작고 공로가 더 크다’는 평가를 내렸다. 앞서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공산당이 장기집권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1년 7월 2일자로 전일 진행된 중국 공산당 창당 60주년 행사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은 비운의 지도자로 평가되는 후야오방 당 주석이다. 그는 덩샤오핑에 의해 추천됐다가 덩의 변심에 따라 자리에서 쫓겨났다. 후야오방은 정치 민주화에 우호적이었는데 그가 1989년 4월 15일 갑자기 사망하면서 추모 움직임이 결국 6·4 텐안먼 민주화 시위로 발전하게 된다.


1991년 7월 2일자로 전일 진행한 중국 공산당 창당 70주년 행사를 보도하고 있다. 사진은 장쩌민 당시 공산당 총서기다. 톈안먼 사태로 집권을 했는데 이후 1992년과 1997년 두 번의 5년을 연임하면서 총 13년간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


1997년 9월 20일자로 중국 공산당 제15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5기 1중전회) 결과를 알리고 있다. 장쩌민이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유임했는데 총서기와 나머지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의 사진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마오쩌둥 시대와는 다르게 집단영도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근거다.


중국 공산당 창당 80주년을 알리는 2001년 7월 1일자다. 사진에 3명은 왼쪽부터 덩샤오핑, 마오쩌둥, 장쩌민이다. 당시 총서기였던 장쩌민이 자신을 발탁한 덩샤오핑의 권위를 빌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후진타오의 공산당 총서기 첫 취임을 알리는 2002년 11월 5일자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9명의 상무위원 단체 사진이 위로 올라가고 최고 권력자 후진타오의 사진은 훨씬 더 작아졌다. 후진타오 시대는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 과두적인 집단영도체제가 그나마 잘 작동한 시대로 평가된다.


2006년 7월 1일로 공산당 창당 85년을 맞았다. ‘공산당원 선진성 교육활동’에 관한 강연이 있는데 이는 마오쩌둥 때부터 진행되던 일종의 당 내외 정풍운동을 의미한다.


2017년 10월 26일자로 중국 공산당 제19기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 시진핑 당 총서기가 선출됐다는 내용이다. 시진핑의 사진 크기가 다시 커졌는데 이는 그의 개인권력과 비례한다. 지면 맨 위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은 7명으로 앞서 후진타오 때의 9명에 비해 줄었다.


홍콩 국가보안법(홍콩 보안법)이 제정됐다는 홍콩 신문 문회보의 2020년 6월 30일자 보도다. 형식상으로는 중국 입법기구인 전인대가 제정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시진핑의 의지라는 것이 지면에 나와 있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행사를 보도한 2021년 7월 2일자 신문이다.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단독 사진과 함께 아래에 그의 기념식 연설의 핵심을 게재한 것이 눈에 띈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 중국 공산당과 인민은 자기 길을 가겠다는 것, 결코 외세의 압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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