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첩한 갈색 여우가 게으른 개의 등 위로 점프했다(The quick brown fox jumped over the lazy dog’s back).’ 1963년 8월 미국 정부가 핫라인을 통해 소련 정부에 보낸 메시지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합의로 개설한 핫라인 ‘레드폰(Red Phone)’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석양에 관한 서정적인 러시아어 메시지로 화답했다. 이후 본격 가동에 들어간 레드폰은 미소가 전면전 직전까지 갔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산물이다. 일촉즉발의 순간을 넘긴 미소는 위기관리 방안에 공감하고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했다.
당시 두 나라는 상대방의 공식 외교 문서를 받는 데 반나절이나 걸렸다. 이런 시스템으로는 쿠바 위기처럼 분초를 다투는 긴급 상황에 대처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드폰은 응급을 상징하는 빨간색에 전화기를 붙여서 만든 용어이지만 실제는 음성 전화가 아닌 텔레타이프 방식이었다. 말 한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긴급 사태에서는 음성 전화가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레드폰은 1980년대 들어 팩시밀리로, 2000년대에는 e메일로 진화했다.
레드폰이 처음 작동한 것은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아랍국 사이에 벌어진 6일 전쟁 때다. 미국 6함대와 소련 흑해함대까지 지중해에 출동하는 등 전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전투 중지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이 이에 호응하면서 전쟁은 확전 없이 6일 만에 끝났다.
미국이 ‘레드폰’과 비슷한 형태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핫라인 구축을 검토하고 있다고 CNN 방송이 최근 전했다. 양국 간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충돌 위험을 줄이는 신속한 소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미 행정부가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 정부도 평화·대화 운운하며 안이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북한의 국지적 도발과 미중 간 우발 충돌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설정해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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