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1년 반을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보냈다. 이번 위기를 돌이켜보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팬데믹에 앞서 우리는 국제사회 시스템을 뿌리째 뒤흔든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다. 2008년의 충격적 경험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 그때 체득한 교훈이 팬데믹과의 싸움에 도움이 됐을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8개월이 흐른 2009년 중반 미국의 실업률은 수십 년 이래 최고 수준을 향해 치달았고, 주식시장은 사상 최악의 폭락 장세에서 벗어나려 허우적대고 있었으며, 거품이 꺼진 주택 시장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팬데믹이 선포된 후 18개월이 지난 지금 미국인의 절반이 백신 접종을 받았다. 경제도 잘 돌아간다. 성장률은 로널드 레이건 시절의 호황기에 버금간다. 주식시장은 연일 신고점을 찍으며 상승장을 이어가고 임금까지 들썩인다. 다른 주요 선진국들 역시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 바탕에는 금융위기에서 걸러낸 교훈이 깔려 있다. 조직적인 붕괴를 수반하는 위기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지출을 확대하고 유동성을 제공하는 등 대담하고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2008년의 위기를 통해 터득한 교훈이다.
하지만 희소식은 여기까지다. 다시 2008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위기 타개를 위한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직감했다. 금융 시스템은 위험하고, 규제가 허술했으며 불안정했다. 2010년 의회는 금융 업계의 필사적인 로비에도 불구하고 대형 은행의 자본 확충 의무화, 차입 투자 비율 축소, 투기성 투자 제한 및 스트레스 테스트 등을 골자로 하는 대대적인 금융개혁법을 제정했다.
사실 팬데믹 기간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 것은 2010년에 단행한 제도적 개혁 덕이었다.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가 거의 완전히 봉쇄된 2020년 지구촌 거의 모든 은행이 이 사태를 꿋꿋이 견뎌냈다. 각국 중앙은행의 지원이 부분적인 이유로 꼽히지만 금융개혁법에 따른 은행들의 자기자본 확충과 강화된 규제도 한몫 단단히 했다.
하지만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불거진 숱한 착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같은 실책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의료 분야의 관료제를 재정비하고, 코로나에 올바르게 대처한 방역 모범국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 받는 한편 또다시 닥칠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정책과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
금융위기와 팬데믹 사이의 분기점은 글로벌 차원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세계적 차원의 협치인 ‘글로벌 거버넌스’는 금융위기 중 놀랍도록 훌륭히 작동했다. 주요국들이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각국의 중앙은행이 유기적인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국제 금융 시스템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중국조차 국제사회의 주요 조치에 적극 동참했다. 미국이 앞장서 다른 나라들의 공동 보조를 끌어냈고, 그들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충실히 해냈다. 경제사학자인 애덤 투즈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풀어놓은 유동성의 절반가량이 유럽 은행들에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정치적으로는 참담한 실패를 기록했다. 반엘리티즘과 민족주의 물결이 휘몰아치면서 지구촌 차원에서 팬데믹에 대한 부실 대응을 불러왔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같은 정치인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외국인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팬데믹에 반응했다. 진보 성향의 정치인들은 보호주의적 법을 제정하거나 심지어 백신 수출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중국의 시진핑은 금융위기 당시의 선임자들에 비해 폐쇄적이고, 비협조적이었으며 다자주의에 냉담했다.
팬데믹 위기 속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산뜻한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워싱턴은 맹목적으로 그의 뒤를 좇아가선 안 된다. 세계 지도국으로서 정치인 바이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백신 접종 대상을 지구촌 주민 전체로 확대하지 않는다면 팬데믹은 계속 우리 곁에 머물 것이고, 변이를 거듭하며 번져갈 것이다.
글로벌 차원의 경제 회복과 성장 유지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막대한 부채에 짓눌린 개발도상국들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분명히 닥칠 미래 위기에 대비하는 최상의 방법은 글로벌 공동 대응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10년 전의 위기 상황에서 바로 이런 시스템이 작동했다. 앞으로도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은 제 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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