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통신연락선이 13개월만에 전격 복원되면서 남북 정상회담 재개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아직은 연락선 복구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화상 실무협의를 비롯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화상 정상회의도 가능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리 정부가 식량·방역물품·백신 등 인도적 지원을 시작으로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가동 재개를 꾀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도 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청와대 등은 벌써부터 발빠른 남북 교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최대 관심사는 네 번째 남북 정상회담 성사 여부다. 이를 두고 정계와 외교가에서는 내년 2월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도쿄올림픽 주최국인 일본과 달리 중국은 김정은에게도 가까운 나라인 데다 한국과도 첨예한 갈등 현안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점도 내년 3월 한국 차기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 정치적 파급력도 극대화 할 수 있다. 다만 남북 관계의 주도권은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는 데다 북한의 변심은 예측할 수 없어 섣부른 기대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무엇보다 장기화되는 코로나19 상황은 남북 정상회담에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보인다.
남북 통신연락선 13개월만에 복원…“文·김정은 수 차례 친서”
지난 27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긴급 브리핑을 갖고 “남과 북은 27일 오전 10시를 기해 그간 단절됐던 남북 간 통신연락선을 복원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박 수석은 “남북 정상은 지난 4월부터 여러 차례 친서를 교환하면서 남북 간 관계 회복 문제로 소통해 왔고 이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통신연락선을 복원하기로 합의했다”며 “양 정상은 남북 간에 하루속히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다시 진전시켜나가자는 데 대해 뜻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지 13개월 만이었다.
북한 역시 이례적으로 청와대와 동시에 이 사실을 알렸다. 조선중앙통신은 “수뇌분들의 합의에 따라 북남(남북) 쌍방은 모든 북남 통신연락선들을 재가동하는 조치를 취하였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북남 수뇌들께서는 최근 여러 차례에 걸쳐 주고받으신 친서를 통하여 단절돼 있는 북남 통신연락 통로들을 복원함으로써 호상 신뢰를 회복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큰 걸음을 내짚을 데 대하여 합의하셨다”며 “통신연락선들의 복원은 북남 관계의 개선과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통일부와 군은 직통전화로 북측과 하루 두 차례씩 통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북측 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한 북측의 사과나 입장이 있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앞으로 협의해 나갈 문제”라고만 답했다. “정상 간 대면·화상 정상회담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협의·논의한 바 없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또 “8월 한미연합훈련 축소 또는 취소 검토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도 “통신연락선 복원과 한미연합훈련은 무관한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文 지렛대로 북미대화 손짓 가능성…北風 우려도
북한이 갑자기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에 나선 것을 두고 외교가에서는 갖가지 해석이 나왔다. 우선 북한이 문 대통령을 지렛대로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설 필요성을 느낀 게 아니냐는 추정이 제시됐다. 그 배경으로는 국제 제재에 코로나19, 폭염·가뭄, 식량난 등 악재가 겹친 점이 꼽혔다.
실제로 김정은은 지난해에는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지난달 노동당 전원회의에서는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며 식량난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날 조선중앙통신도 “지금 온 겨레는 좌절과 침체 상태에 있는 북남(남북) 관계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남북이 한국의 ‘유엔군 참전의 날’이자 북한의 ‘전승절’인 정전협정 68주년에 맞춰 연락을 재개한 점도 미국에 ‘종전 선언’ 추진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대북 전문가들은 다만 북한이 그동안 남북 통신연락선을 정치적 불만과 관계 개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온 만큼 지나친 낙관론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태도 변화가 문 대통령을 향한 것이 아니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만을 향했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북한은 그간 남북 연락선 차단·접속을 불만 표출과 이익 관철 수단으로 수차례 악용한 전례가 있다. 북한은 지난해 6월9일 탈북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빌미로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같은 달 16일에는 별다른 원칙도 없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개성공업지구 완전 철거,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 등을 거론했다. 또 북한은 2016년 2월에도 남측이 개성공단 운영을 중단하자 연락 채널을 곧바로 끊었다. 북한이 이후 연락선을 복원한 시점은 북미대화 가능성이 보였던 2018년 1월 3일이었다.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에도 북한은 대북 제재와 한미연합훈련에 불만을 내비치며 판문점 연락을 중단했다. 2010년 5월에는 우리 정부가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5·24 조치를 단행하자 판문점 채널을 닫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차기 한국 대선과 한미일 안보 공조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내놓았다. 미중 갈등 속에서도 북한 제재 완화에 대한 국제적 지지는 거의 없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북한이 정말 북미 대화를 원했다면 굳이 임기 말을 맞은 문 대통령을 통하지 않고 직접 미국과 접촉하는 게 빠르다는 점도 이 분석에 힘을 실었다.
외신 “판문점에 연락소 재건설 논의”…靑 “민족의 미래를 위한 결단”
북한의 태도 변화에는 해외 언론도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영국의 로이터통신은 28일 3명의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남북한이 지난해 철거한 공동연락사무소를 재건설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판문점 휴전마을에 공동연락사무소 를 재건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인 사정이었다. 북한 개성 지역에 설치했다가 1년9개월만에 폭파된 기존 연락사무소와 달리 판문점 지역에 새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경우 북한이 이를 마음대로 폭파하기는 어려워진다.
청와대는 이 같은 보도를 강하게 부정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남북, 정상회담 개최 논의중’이라는 외신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논의한 바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같은 날 서울경제와의 전화 통화에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과 관련해서는 현 시점에서 북한과 협의한 적이 없다”며 “앞으로 협의할 문제”라고 밝혔다.
박수현 수석도 이날 TBS 라디오 ‘명랑시사, 이승원입니다’에 출연해 “로이터 통신 보도에 깜짝 놀랐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재차 부인했다. 박 수석은 다만 “앞으로 남북 간에 많은 대화를 또 해 나가야 되는데 전화만 가지고 서로 협의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우선 코로나 비대면 시대이기 때문에 화상으로 서로 실무 접촉을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양 정상 간에 운용되었던 핫라인의 복원도 논의해 볼 수 있다”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징검다리를 놓다 보면 결과적으로 화상일 수밖에 없는 여건일 경우 정상회담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식량난, 방역·민생 문제 때문에 대화에 나선 건 아니냐는 지적에는 “양 정상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고 하는 결단으로 시작한 것”이라며 “북한이 국내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관계 개선에 나섰다고 평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인영 ‘대북 지원’ 속도…北 “文이 관계 책임져야”
전문가들은 북한의 속내와 관계 없이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상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데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단기적으로는 8월 한미연합훈련 조정, 남북 실무·정상회담, 북미 대화 재개, 백신·쌀 인도적 지원 등이 추진 사항으로 꼽힌다. 장기적으로는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남북 철도 연결 등도 정부 목표로 지목된다.
이와 관련해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27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발표문을 게시하며 “이제 시작이다. 개성공단, 이산가족 상봉 등 더 노력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30일 곧바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영상회담 시스템 구축 협의를 29일 이미 북한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또 30일부터 민간단체 대북 지원 물자 반출 승인을 재개한다고 공언했다. 남북 감염병 정보 교환도 재개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29일 기자들과의 서면 질답을 통해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만큼은 가장 시급한 인도적 사안으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며 “특히 즉시 추진할 수 있는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위해 남북 간 협의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미국도 일단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젤리나 포터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은 27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미국은 남북 간 대화와 관여를 지지하며 남북 통신선 복구 발표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커트 캠벨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조정관도 같은 날 한미동맹재단, 주한미군전우회 관계자와 조찬을 한 뒤 특파원들의 관련 질문에 "우리는 북한과의 대화와 소통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면 북한은 주민에게 공개되는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를 통해 남북 통신선 연결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지난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를 교훈 삼아 주민들에게 섣부른 기대감을 심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김정은은 다만 ‘전승절’ 노병대회에서 지난해와 달리 대미 비난이나 핵무력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지난해처럼 “자위적 핵억제력”을 강조하기보다는 “사상 초유의 세계적인 보건 위기와 장기적인 봉쇄로 인한 곤란은 전쟁 상황에 못지않은 시련의 고비”라는 표현을 썼다.
북한의 대외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30일 ‘북남수뇌분들의 합의에 따른 통신 연락선 재가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고 “지금 북남 관계 회복을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통신선 재가동을 북측 경제난과 억지로 결부시켜 자의적 분석을 내놓고 있다”며 “(문 대통령이) 북남 관계가 잘되든 못되든 그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는 자세와 입장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與,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계기 남북 정상회담 기대…코로나는 변수
외교가 안팎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모멘텀이 정점에 이를 시기를 대체로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내년 2월로 예상했다.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8개월도 남지 않은 임기를 고려할 때 북한과 단계적 대화를 나눈 뒤 대선 한 달 전 정상회담을 꾀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 전략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북한은 2018년 2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김정은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을 김일성 일가로는 처음으로 남한에 보낸 바 있다. 이는 이후 잇딴 남북·북미 정상회담의 신호탄이 됐다. AP통신도 28일(현지시간) 도쿄올림픽에는 불참했던 북한이 베이징 동계올림픽부터는 움직임을 재개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통신은 “과거 행태에 비춰본다면 대회 시작 몇 달 전 무기 실험을 실시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 같은 관측에는 중국이 북한의 전통적 우방 국가라는 점도 반영됐다. 미중 갈등 속 한국이 미국 쪽으로 더 기울지 않게 하려는 중국 측의 수요도 있다. 문 대통령 입장에서도 갈등 관계에 있고 대북 문제에 대한 인식도 다른 일본보다는 중국 쪽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편이 덜 부담스러울 수 있다. 김정은에게도 시진핑 주석과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게 향후 미국과의 대화판을 조성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있다. 김정은은 28일에도 북중 우의탑에 헌화하면서 양국의 혈맹관계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유력 대선 후보인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9일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제일 높은 시기는 내년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라며 “시 주석이라면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세계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기 위해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싶은 마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문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불리는 윤건영 민주당 의원도 27일 MBC 라디오 ‘표창원의 뉴스하이킥’에 나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남북 정상회담의 적기라는 분석에 대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해 잃어버렸던 남북관계 10년을 되찾아왔던 계기를 만들었지 않느냐”며 “그렇게 볼 수 있다”고 긍정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 역시 28일 외교안보연구소(IFANS) 국제문제회의에서 “중국은 우리의 전략적 협력동반자로서 북핵 문제의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야할 중요한 파트너”라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전해 나가기 위한 한중 간 협력이 더욱 확대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 같은 시나리오에는 코로나19 상황이 그때까지 어느 정도 진정된다는 가정이 뒷받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해 1월 이후 여전히 국경을 봉쇄 중이다. 문 대통령이 중국에 가기 위해서는 형식상 시 주석이 먼저 연내에 방한을 해야 모양새가 낫다는 점도 외교적 걸림돌이다.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이 아닌 중국에서 남북 대화 계기를 만드는 것에 대해 미국을 어떻게 설득할지도 중요한 관건이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