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로 목숨을 잃은 3,000여 명의 희생자들에게는 ‘가격표’가 붙었다. 당시 미국 법무부가 임명한 보상 기금의 특별 단장 케네스 파인버그는 희생자의 경제적·비경제적 가치와 피부양자 가치 등을 합산해 사망자 별로 보상금을 정했다. 금액은 25만~700만 달러로 격차가 매우 컸다. 비경제적 가치는 모두 동일한 25만 달러에 피부양자 1명 당 10만 달러 씩 추가됐지만, 경제적 가치는 차만별이었다. 사망자의 평생 기대소득, 각종 수당, 기타 혜택 등을 계산한 뒤 사망자의 실효세율에 맞춰 산정한 값이다. 희생자의 경제력에 따라 최고 30배의 차이가 난 이 목숨 값 계산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에 값이 매겨진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일지라도 말이다. 저명한 통계학자이자 보건경제학자인 저자는 신간 ‘생명 가격표’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 측정’이라는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이슈를 조명한다.
책은 9·11 보상금을 비롯한 미국의 각종 사례를 바탕으로 인간 생명에 일상적으로 가격표가 매겨진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이 가격표가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가치란 늘 동등하다는 것이 ‘옳은 말’이지만, ‘현실적인 말’은 아닌 세상이란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생명 가격표의 불공정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격표가 낮게 책정된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높은 가격표가 붙은 사람들에 비해 더 큰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책은 이 불공정한 가격표가 인간이 먹는 음식부터 버는 돈 같은 개인 생활은 물론, 처벌이나 민사소송의 배상금 문제와 같은 법리적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를 전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한국 등 일부 문화권에서는 태아의 성별에 따라 임신 중단이 이뤄진다고 소개하며 “가격표가 출생 이전에도 부여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생명 가격표에는 젠더와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편견이 반영된다. 저자는 “노인보다는 청년의 생명이, 가난한 이보다는 부자의 생명이, 흑인보다는 백인의 생명이, 외국인보다는 미국인의 생명이, 낯선 이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생명의 가치가 불공정하게 매겨질 때마다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어떤 경우에도 억만장자 한 사람의 죽음이 평범한 사람 100명의 죽음보다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기업이나 정부가 고작 몇 푼을 아끼느라 사람의 생명을 불필요하게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몇 푼을 아끼느라 산업 현장에서 수많은 목숨이 생사를 오가고, 사라지는 현실.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만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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