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수십편의 연극, 영화,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형이 코로나19 확산 이후 정육회사에서 배달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배를 배웠고, 대리운전도 했다. 통화할 때마다 “지금은 힘들지만 곧 괜찮아질거야”라고 하지만, 그렇게 일년 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세상은 자영업자의 매출 감소를 우선 언급하지만, 공연으로 먹고사는 이들에게 코로나19는 지옥에 떨어진 것과 같다. 공연 편수가 확연히 줄어들면서 소수의 배우들이 독점하는 경향도 보인다. 신인과 실험과 창작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공연은 계속되고 있다. 객석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흥행할 자신이 있는 건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 연락이 닿는 공연계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결같다. “타격은 있겠지만, 그걸 무서워하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십여년을 봐왔지만 하루에 밥 한끼만 먹고 나머지는 꿈만 먹으라고 해도 살 사람들이 그쪽 사람들이다.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 관객과 호흡하고 싶은 마음, 커튼콜에 박수받고 싶은 욕심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공연을 만들고 하고 알리는 이들 누구나 그랬다.
이 와중에 몇 년에 한번씩 일어났던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의 첫 공연을 본 관객의 촌평에 배우 김호창이 거친 반응을 보이면서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분명 흥분했기에 충분히 거르지 못했을 발언이 문제였다. “(프리뷰 공연이라)반값으로 다들 오셨잖아요”나 유명 프로듀서들을 지목하며 “당신들이 얼마나 잘났기에 내가 별로라고 합니까”라는 발언도 지적받았지만, 자신은 전문 뮤지컬 배우도 아닌데 가창력 운운하냐는 말은 그날 관객들에게 분명히 선을 넘었다.
논란이 커지자 제작사 측은 하루 뒤 대응에 나섰다. 엔에이피엔터테인먼트는 19일 보낸 공식입장을 통해 김호창과 공연 출연계약을 체결했고, 계약금도 지급했다고 밝혔다. 공연일정과 장소가 변경되는 과정에서도 사전 동의 절차를 거쳤고, 수정 계약서의 내용도 구두와 문자로 안내했다. 공연 일정이 지연되면서 연습 기간도 충분했고, 음향 확인 등 리허설도 통상적으로 진행됐다. 그를 위해 별도의 장면을 준비해 가창 부담을 줄였고, 연기 및 가창 상태 등을 파악한 뒤 스케줄을 조정하고 연습기간을 더 가질 것을 제안했으나 그가 제안을 거절하며 하차 의사를 밝혔다는 주장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공연 스태프가 SNS에 관객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면서 논란으로 번졌다. 단 몇자의 짧은 글로 인해 작품은 공개 사과를 해야 할 만큼의 타격을 입었다. 극소수 스태프의 우월감 때문이었을까, 마니아들에 대한 무시 때문이었을까. 많은 관객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년이 흘렀어도 이들 작품명과 ‘사태’를 연결해 불린다. 이제는 잊혀질만한데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기사를 통해 ‘삼천원짜리 라면도 덜 익었으면 더 끓여달라고 할 수 있는게 손님 아니냐’고 그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기자의 리뷰나 평론가의 평이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을 평가하는 시기는 벌써 지난지 오래다. 트위터로 시작된 SNS의 폭발적 성장, 유튜브의 전문화를 통해 이제 관객들은 직접 흥행여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공연계는 프레스콜에 마니아들을 초청하거나, 그들을 위한 특별 이벤트를 마련하거나, 최종 리허설을 라이브 중계 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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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가격이 반값이라 해도 프리뷰의 질이 떨어져서는 안된다. 프리뷰는 완성된 작품을 관객의 반응에 따라 약간 수정하는 기간이다. 창작 초연인 뮤지컬 ‘인서트 코인’은 이 시간이 절대적으로 소중했다. 스토리가 어쩌고, 노래가 어쩌고 하는 귀찮고 잔소리 같고 듣기 싫은 이야기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감사한 기간이다. 갓 태어난 작품은 그렇게 비판과 욕을 먹고 성장해 젖병을 떼고 숟가락을 든다. 거리두기 4단계가 적용된 시점인 만큼 평상시의 20~30%보다 더 할인한 티켓을 공급해 관객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반값’은 그렇게 나왔다.
리허설과 음향체크, 배우의 역량은 무대의 막이 오르는 순간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다. 관객은 이야기의 흐름이 어떻게 연결되며, 그것을 끝까지 끌어가는 힘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힘은 모든 것들의 조화에서 나온다. 객석에 앉은 관객은 스태프와 배우 개개인의 사정을 모른다. 그들 앞에 놓인 기회는 단 한번 뿐. 완벽하든, 실수가 있든, 엉망이든 관객은 이날 공연을 두고두고 기억한다.
창작 초연인 ‘인서트 코인’이 지금 시기에 공연되는 것은 흥행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함께 캐스팅된 신인급 연기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김호창의 인지도는 아마 작품을 알리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잠깐의 화가 불러왔다고 하기에 동료 배우들과 제작사가 받은 타격이 크다. 갓 태어난 작품의 이미지에도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관객들은 작품의 초연을 본 것을 두고두고 자랑으로 여긴다. 지금은 ‘사의 찬미’라는 이름으로 공연되는 ‘글루미데이’를 기억하거나, ‘그날들’의 초연 프리뷰 첫 공연 첫 장면에서 영상이 잠시 끊겼다거나, ‘번지점프를 하다’의 중극장 초연과 대극장 재연의 변화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며 쾌감을 느끼는 분들을 그동안 정말 많이 만났다.
나 역시 대학생 시절인 2007년 처음 본 뮤지컬 ‘달콤한 안녕’의 대표 넘버를 아직 기억한다. 故 안현정 작가의 대본집도 사다가 고이 모셔놨다. 회사에서 수습과정이 끝나고 담당 분야를 정해야 할 시기 머리를 흔든 작품이 바로 ‘달콤한 안녕’이었다. 단 하나의 작품, 단 한번의 공연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키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 여부에 상관없이 그의 등장부터 퇴장까지 모든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펜질 하나하나는 작품을 향한 팬레터이며, 소중한 역사다. 그리고 그 작품이 다시 공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금의 모든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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