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을 둘러싼 ‘특혜 논란’이 일자 법무부가 연일 법률 대리인을 자처하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도 직접 나서 다른 재벌 총수들과의 사례를 꺼내 들면서 이 부회장의 경영활동은 취업제한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정부와 국민 여론이 이 부회장에게 ‘백신·반도체’ 분야에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 법무부가 이 부회장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박 장관과 법무부는 최근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이 부회장의 가석방 후 경영활동을 취업제한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법무부 “박찬구 취업제한 위반 사례와 달라” 공식 입장
이 부회장의 경영활동 복귀와 관련해 가장 뜨거운 쟁점은 취업제한 처분을 받았던 다른 재벌 총수들과의 ‘형평성’ 여부다. 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법(특경법)상 5억원 이상 횡령·배임 등의 범행을 저지르면 형 집행 종료?정지 후 5년 간 관련 기업의 취업이 제한된다.
법무부는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에 대한 판결문 분석까지 해가며 이 부회장에게는 위법 사항이 없다는 식의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우선 박 회장은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특경법상 배임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판결을 확정 받고 집행유예 기간인 2019년 3월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듬해 법무부는 박 회장에게 '금호석유화학이 취업제한 기업체이므로 승인신청을 하지 않으면 형사조치가 진행된다'고 통지했다. 박 회장은 이후 취업승인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무부를 상대로 취업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 2월 패소했다. 당시 박 회장이 회사의 대표이사 및 등기이사인 점이 발목을 잡았다.
재판부는 “취업제한은 특정경제범죄 행위자에게 범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기업체에서 일정기간 회사법령 등에 따른 영향력이나 집행력 등을 행사하거나 향유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취업제한의 핵심인 ‘회사법령 등에 따른 영향력·집행력’은 상법 및 회사 정관에 의해 권한과 의미가 부여되는 ‘대표이사·등기이사’의 영향력, 의사 집행력 등을 의미한다고 봤다. 이에 따라 등기임원이었던 박 회장과 미등기임원인 이 부회장의 케이스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주주총회의 선임 결의를 거쳐 임명되는 등기임원과는 달리 미등기임원은 회사로부터 이사라는 직함을 형식적·명목적으로 부여받은 것일 뿐이라 상법상 이사로서의 직무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어 ‘취업’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다.
朴 “李 무보수·비상임·미등기 임원…취업 아냐”
반대로 최 회장은 2014년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이 확정됐지만, 2015년 8월 사면될 때까지 ‘무보수 미등기 임원’으로 회장직을 유지했다.
이와 관련 박 장관은 “이 부회장은 몇 년째 무보수이고 비상임, 미등기 임원 상태이기 때문에 취업이라고 보긴 어렵다”며 앞선 최 회장의 사례와 과거 국민권익위원회가 비위 면직 공무원의 재취업을 판단할 때 '무보수'인 점에 방점을 찍은 사례 등을 제시했다.
결국 법무부의 판단은 이 부회장의 현재 행보는 법적 문제가 된 박 회장과는 거리가 멀고,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최 회장과는 가깝다는 쪽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 역시 법무부의 판단이 옳다는 입장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취업의 개념을 ‘보수를 받고 노무를 제공하는 행위’로 엄격하게 해석한 법무부의 입장이 맞다고 본다”라며 “대주주로서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기여하는 것까지 취업으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전삼현 숭실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등기이사가 아닌 이 부회장이 이사회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고 지금의 경영참여는 일반인 신분에서 경영진에게 협조를 구하는 수준으로 보인다”며 “현재로선 취업제한 규정에 위반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법무부 연일 가석방 관련 발언 부적절”
법무부가 이 부회장의 경영활동 복귀에 문제없다는 입장을 연이어 밝히는 데 대해 국가위기 상황에서 ‘1위’ 기업 총수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됐다는 시각이 나온다. 국가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대가로 일종의 당근을 쥐어주고 있다는 해석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3일 이 부회장에 대한 가석방 결정 배경에 대해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며 “엄중한 위기 상황 속에서, 특히 반도체와 백신 분야에서 역할을 기대하며 가석방을 요구하는 국민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일부 여론의 반발이 있더라도 현 시점에선 ‘코로나 위기 극복’이라는 대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사면이 아닌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 부회장은 현재 경영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라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기 쉽지 않다. 이에 취한제한 관련 권한을 보유한 법무부가 이 부회장이 법망에서 백신이나 반도체 등 국가적 현안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반응도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경영활동을 둘러싼 정부의 연이은 입장 표명은 자제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에 협조할 시 ‘사법 특혜’가 따를 수 있다는 여지로 해석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져 사회적 갈등이 커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일부 시민단체는 이 부회장에 대해 취업제한 규정 위반으로 고발을 예고한 상태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통령이 기업인을 가석방하는 과정에서 백신과 반도체에 대한 기대감을 말하는 것은 마치 신병을 볼모로 잡고 과제를 풀어야 한다고 압박하는 모양으로 비쳐진다”며 “이번 사례가 정면으로 법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을 우회해 사실상 그 취지를 무력화시킨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이 때문에 법무부도 입장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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