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입법 마비 상황은 지난 2019년 말 ‘패스트트랙(선거법, 공수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 사태가 잘 보여준다. 정부 여당은 당시 ‘4+1 협의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을 구성해 위성정당을 탄생시킨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을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야권은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가 장외 단식 투쟁에 나섰고 소속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로 맞서며 정국은 급랭했다. 이후 4·15 총선 국면에 접어들자 야권은 코로나19 국면에서도 민생을 외면한 채 장외 투쟁에 몰입했다. 결과는 여론의 역풍을 맞은 야권의 선거 참패였다.
극단적 대결 정치는 수많은 개혁과 민생 법안 증발로 귀결됐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와 패스트트랙이 2020년 총선 국면까지 이어졌다. 결국 국회의 법안 심사 기능과 협의 기능은 작동 불능 상황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본회의의 문턱에 오르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된 법안만 1만 1,010건에 달한다. 박근혜 정부 4년여간 폐기된 법안(9,892건)보다 많다.
더 큰 문제는 21대 총선에서 국회의 입법 동맥경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 점이다. 서울경제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해 분석한 결과 지난해 6월 21대 국회가 개의된 뒤 올 8월 31일을 기준으로 1만 1,251건의 법안이 발의(의원 발의 기준)됐다. 하지만 이 가운데 8,875건, 78.8%가 계류돼 있다. 발의된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비율도 19.5%다. 이명박 정부(35.1%), 박근혜 정부(34.5%)와 비교하면 법안 가결 비율이 15%포인트 이상 추락했다.
4·15 총선 이후 탄생한 180석의 범여권이 입법 일방 독주를 선택한 점이 폐기 법안을 양산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민주당은 21대 국회 개의와 함께 관례를 깨고 18석의 국회 상임위원장을 모조리 차지하며 사실상 입법 일방통행을 선언했다. 거대 여당이 일방 독주를 선택하면서 정권 차원에서 중요하지 않은 법안은 진중한 논의조차 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당은 장기적 비전보다는 시류에 편성한 입법에 몰두해왔다. 지난해 부동산 폭등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군사작전하듯 임대차 3법을 처리했다. 민주당은 시장에 큰 혼란을 줄 이 법을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대체 토론과 소위원회 회부·심사, 법조문 심사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2시간 만에 처리했다. 이후 본회의에서도 단독으로 의결했다. 또 5·18역사왜곡처벌법과 기업 경영권과 지배구조에 큰 부담을 주는 기업 규제 3법 등을 법사위에서 단독으로 넘긴 뒤 본회의에서 처리했다. 이 외에 해고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이른바 국제노동기구(ILO) 3법 역시 여당 주도로 본회의를 넘었다. 북한 노동당 부부장인 김여정의 ‘하명법’으로 불린 대북전단금지법 역시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비 28조 원이 들어가는 가덕도신공항특별법 또한 졸속 처리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래를 위한 개혁 법안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지난해 국민의힘을 이끌었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제안한 고용 유연화 등의 내용을 담은 노동법 개정안은 여당의 철저한 무시 속에 화두에 오르지도 못했다. 또 파견노동자보호법(홍준표 의원)은 물론 해외 자본으로부터 경영권 방어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추경호 의원) 등 노동시장 이중 구조를 풀고 기업 지배구조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개선할 법안도 진지한 심사조차 되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개혁위원회설치법(최혜영 의원)과 학업성취도평가 전수조사법 등 연금·교육 개혁 법안 역시 잠자고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입법부가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있지 않고 있다”며 “특히 여당은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대중적인 인기와 지지율을 유지하기 힘든 법안은 진중한 심사를 안 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보였다”고 꼬집었다.
뼈아픈 대목은 야당인 국민의힘마저도 개혁에 손을 놓았다는 점이다. 의석수의 열세를 방어막으로 삼아 내년 대선에서 표를 잃을 우려가 있는 개혁 법안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야당이 반대만 하며 여당에 독주 프레임을 씌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입법 활동 성과도 낮아진 것”이라며 “여당 탓을 하면서 야당도 표가 안 되는 인기 없는 입법은 안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정기국회 역시 입법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대선 전 정국 주도권을 놓고 거대 여당과 야당의 치열한 대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연금, 노동, 재정 정상화 등 미래를 위한 구조 개혁 법안은 폐기되고 숙제는 차기 정부에 넘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신 교수는 “한쪽은 정권을 재창출해야 하고 한쪽은 정권을 탈환해야 하는 입장”이라며 “(대선 전에는) 매번 국회가 투쟁의 장이 됐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