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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인간은 없지만 쓸모없는 노동은 있다

[불쉿 잡-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민음사 펴냄]

자본주의 성장에 직업군 늘었지만

'필수 노동 분야인가' 물음표 던져

각국 정부 일자리 창출에 힘쓰지만

질 낮은 고용으로만 메우기 급급

필수 직업은 제대로 대우 못 받기도

저자 "당신의 일, 솔직히 의미 있나"

기형적 노동시장 문제 조목조목 따져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 15시간 근로가 가능할 것이라 예견했다. 1930년의 일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케인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 발전의 속도를 생각하면 인간의 직접 노동은 점점 필요 없어질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20년 넘게 지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또 다른 이는 너무 긴 노동 시간 때문에 힘들어한다. 더 기가 막힌 사례도 있다. 분명히 풀 타임 노동이고 적지 않은 임금을 제공하지만 ‘과연 필요가 있는 일인가?’라는 의문의 대상이 되는 일자리의 존재다. 주변의 ‘월급 루팡’들에게만 향하는 질문이 아니다. 자기 객관화가 되는 이들은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처럼 노동 시장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에게 “네 생각이 맞아, 그 일은 허튼 짓, 불쉿(bullshit)이야”라며 돌직구를 날린 학자가 있다.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때 ‘우리가 99%’라는 구호를 만들어 시위대 앞에 섰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다. 그레이버는 지난해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2년 전, 기형적인 노동 시장의 문제를 조목조목 따져 물은 저서 ‘불쉿 잡((Bullshit Jobs)’을 내놓았고, 책은 최근 민음사를 통해 국내에도 번역 출간됐다.

책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한국어로 마땅한 대체어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굳이 번역하자면 ‘쓸모 없는 직업’ ‘쓰레기 같은 일’ 등으로 바꿀 수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없어져야 마땅한 일을 저격하는 책이 아니기에 출판사 측은 원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난 해 9월 2일 작고한 데이비드 그레이버 런던정경대 교수. 그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당시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만들었던 인물이다./AP연합뉴스


그레이버가 ‘불쉿 직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꺼냈던 건 2013년이다. 한 온라인 매체에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고, 조회 수가 100만 회를 넘어서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글은 한국어를 포함한 17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많은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불쉿’이라고 고백했다. 그레이버의 주장에 반박하는 글도 잇따랐다. 2005년 예일대에서 해고 당한 후 2011년 월가 시위를 이끌고, 2013년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정경대에 다시 둥지를 튼 그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레이버의 사회 비판은 대담하고 논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심도 있는 연구를 담은 이 책에서 그레이버는 ‘불쉿 잡’이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이며, 종사자는 그 직업이 그런 일이 아닌 척해야 하는 의무를 느낀다”고 정의한다. 그레이버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3분의 1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6년 동안 자리를 비우고 스피노자를 연구해 전공자가 됐다는 스페인 공무원,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죽었는데도 이틀이 지나도록 동료들이 알아채지 못한 회계 감사관 등이 맡았던 일이 불쉿 잡에 해당한다.



페덱스 배송 직원이 지난 해 9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배송 물품을 나르고 있다. 택배 기사는 카지노 영업 책임자보다 급여가 적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와 존엄 면에서는 택배 기사의 일이 더 중요하다./AFP연합뉴스


그레이버는 구체적으로 불쉿 잡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상사나 관리자를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복 입은 하인’, 타인을 공격하는 요소가 있으며 누군가가 채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깡패’, 덕트테이프처럼 임시방편으로 때우는 업무만 하는 ‘임시 땜질꾼’, 실제 목표와 아무 상관 없는 서류만 만드는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그리고 이런 불쉿 업무를 만들어 배분하는 중간관리자 ‘작업 반장’이다. 그레이버는 무의미한 노동, 즉 불쉿 업무가 현대인들의 영혼에 상처를 내어 자괴감, 무력감, 원망, 우울 등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불쉿 직업이 이렇게 많이 양산된 이유는 뭘까. 그레이버는 최근 100여 년 동안 세상의 판도를 바꾼 금융 자본주의의 성장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금융, 보험, 부동산 등은 1990년대에 이미 경제에서 절반 이상을 비중을 차지했다. 환경미화원, 의료인, 교사, 배달원 등 필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 영역과 달리 금융 영역은 필수 노동을 위한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지 않는다. 반면 정부는 좌파든 우파든 일자리 창출을 핵심 과제로 앞세운다. 이로 인해 결국 쓸모 없는 일자리만 늘어나고, 필수 노동의 대가와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레이버는 불쉿이 아닌 필수 직업의 가치가 떨어지고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게 되면 사회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다만 책은 기본소득 자체를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합리적 생계 유지 수준의 소득이 보장된다면 불쉿 일자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탈출이 용이해질 것이며, 사회에 꼭 필요한 일자리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행동파 지식인의 마지막 믿음을 강조한다.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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