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탈원전' 국가로 꼽히는 이탈리아에서 돌연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을 둘러싼 논쟁이 점화돼 주목된다. 물리학자 출신의 장관이 차세대 원전 기술에 기대하며 원전을 찬성하고 나서면서다.
로베르토 친골라니 생태전환부 장관은 지난 1일(현지시간) 중도 정당 이탈리아비바(IV)가 주최한 정치학교 정책 강좌에서 "농축 우라늄과 (핵반응에 쓰이는) 중수(重水) 없이 가동 가능한 4세대 원전 기술이 출현하고 있다"며 "몇몇 국가가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있는데 성숙 단계에 근접했다"고 밝혔다. 이어 "미래 어느 시점에 적은 양의 방사성 폐기물과 높은 안전성, 낮은 비용 등이 검증된다면 이 기술을 고려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며 "우리 후손들을 위해 이런 기술을 이데올로기화하지 말자. 팩트에 집중하고, 그것이 가능해질 때 그에 따라 결정을 내리면 된다"고 부연했다.
원전 이슈는 이탈리아에서 10년 가까이 잠복해있었는데 갑자기 끄집어낸 셈이다. 특히 친골라니 장관은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과격한 환경주의자들이 기후 재앙보다 더 위험하다고 직격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물리학자 출신의 정보통신(IT) 분야 전문가로 지난 2월 마리오 드라기 총리 내각 출범 당시 신설된 생태전환부 초대 장관으로 임명됐다.
친골라니 장관이 언급한 4세대 원전은 초고온가스로·소듐냉각고속로·가스냉각고속로·용융염원자로 등을 일컫는다. 방사성 폐기물 최소화와 높은 경제·안전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미국·중국 등이 2030년께 상용화를 목표로 활발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는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반(反)원전 여론이 비등하자 1987년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탈원전을 결정했다. 당시 운영되던 원전 4기는 즉각 가동이 중단됐고 현재는 해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 최초의 탈원전 국가로도 종종 언급된다. 2000년대 들어 지구온난화 대응을 위해 원전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여론도 호의적으로 변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원전 정책의 방향 전환을 추진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여파로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원전 재추진과 관련한 2차 국민투표 역시 압도적인 표 차로 부결됐다. 이후 이탈리아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원전 이슈가 터부시돼왔다.
친골라니 장관의 난데없는 원전 발언에 정치권도 발칵 뒤집혔다. 특히 상·하원 최다 의석수를 가진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M5S)은 친골라니의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할 정도다. '환경주의'를 표방하는 오성운동을 이끄는 주세페 콘테 전 총리는 당장 오는 14일 친골라니 장관을 만나 원전 정책에 대한 명확한 정부 입장을 요구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극우정당인 '동맹'(Lega)의 당수인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은 "원자력 에너지만큼 깨끗하고 안전한 것은 없다"며 친골라니 장관의 발언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큰 논란이 일자 친골라니 장관은 4일 한 행사장에서 취재진에 "정책 제안을 한 게 아니라 단순히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개인적인 의견을 얘기한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다만 그의 발언을 계기로 현지 에너지 업계에서도 원전 재가동의 실현 가능성과 정부의 미래 포괄적 에너지 정책 등을 둘러싼 논쟁에 불이 붙은 모양새여서 여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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