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강은 오래 전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걸핏하면 악몽에 시달렸다. 소설에서 다룬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거대한 폭력은 걸핏하면 작가의 잠자는 시간을 짓밟았다.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2014년 5월 소설이 출간된 후에도 계속됐다.
‘소년이 온다’를 쓰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음을 직감했을 무렵인 2014년 6월, 한강은 새로운 꿈을 꿨다. 밀려드는 바다, 검은 나무들, 눈 내리는 벌판, 그 곳에 엎드린 봉분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연한 장면들이었다. 꿈이 너무 생생해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4년이 더 흐른 어느 날, 꿈 속 장면들이 불현듯 1990년대 후반 제주에 잠시 내려갔을 때 살던 집 뒤편 돌담과 오버랩 됐다. 돌담 길을 걷던 집주인 할머니가 무심히 꺼냈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4·3 때 이 돌담에서 사람들이 총을 맞아 죽었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순간 시작됐다. 꿈에 대한 기억과 실제 경험에 대한 기억이 연결된 것이 시작점이 됐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처럼 “작가가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듯, 제주 4·3이 한강의 문장을 원했던 것이다.
어쩌면 기이할 수도 있는 소설의 시작, 그리고 1년 정도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을 만큼 쉽지 않았던 집필 과정 끝에 한강의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가 오는 9일 공식 출간된다. 5년 만에 내놓은 장편 소설이다. 초판 한정본은 이미 예약 판매가 끝났다. 그 만큼 한강의 새 작품을 기다린 독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한강은 출간에 앞서 7일 가진 온라인 기자 간담회에서 “이 소설을 쓰는 데 사실 너무 오래 걸렸다. 제 자신도 이게 과연 완성될 수 있는 소설인가 의문은 품었던 게 사실”이라며 “제게는 소설 마무리가 너무 감사한 일이고, 오랜 시간 동안 썼기 때문에 하나의 물성을 가진 책으로서 제 손에 쥐어졌다는 게 굉장히 뭉클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새 책에 대해 한강은 “그 동안 사람들이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어떨 땐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답했고, 어떨 땐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 가는 소설이라고 얘기했다. 또 어떨 땐 제주 4·3을 그린 소설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모두가 진심으로 한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그 중 하나를 꼽는다면 ‘지극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다. 우리로 하여금 단지 하나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과 연결되게 하는, 항상성과 초자연성에 기반하는 힘이다. 이 사랑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기꺼이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경하와 인선, 인선의 어머니, 그리고 오래 전 죽은 사람들은 그렇게 연결된다. 사람과 사람, 기억과 기억의 연결 과정은 인선의 잘린 손가락을 봉합하는 일처럼 단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고통스럽지만, 고통 없이는 불가능하다. 절단된 손가락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신경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환부를 바늘로 찔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힘든 집필 과정을 마친 한강은 “이번 작품이 고통으로부터 저를 구해줬다"고도 말했다. 그는 “‘소년이 온다’를 쓸 때 죽음이 제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면, 이 소설을 쓰면서는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오는 경험을 했다”고 돌아봤다. “껴안기 어려운 걸 껴안을 때 물론 고통이 따르지만, 그게 죽음 대신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죽음에서 빠져 나왔다는 한강의 다음 작품은 어떠할까. “3편 정도 밀려 있어요. 눈 3부작도 완성해야 하고요. 마음 속에 몇 가지가 맴돌고 있지만 이번 소설과는 결이 다를 겁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려는 방향이 다른 게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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