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진행된다면 한일 관계는 파국을 맞을 겁니다. 현 정부가 이 문제를 (차기 정부로 미룬 채) 그냥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손열(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9일 서울 신촌 연세대 새천년관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현 상태를 방치할 경우 한일 관계에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손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 박사를 거쳐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과 도쿄대 특임초빙교수, 캘리포니아대 방문학자를 거쳤다. 한국국제정치학회장과 현대일본학회장을 역임했고 와세다대 고등연구원 시니어 펠로, 외교부·한국국제교류재단 자문위원, 동북아시대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지낸 일본 정치와 국제 정치 전문가다. 현재는 연세대 국제학연구소장과 동아시아연구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손 교수는 현 정부 들어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추락했다고 단언한다. 그는 “지난 2018년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의 경제 보복과 한국의 맞보복,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등을 거치면서 계속 악화했다”며 “주식으로 치면 이제는 하한가를 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바닥까지 추락한 한일 관계를 되돌릴 계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국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한일 모두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손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한국의 기성세대와 정치인들은 식민 지배에 따른 반일 감정, 일본에 대한 열등감 등으로 반일 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일본 역시 ‘한국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이런 낡은(old)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관계 개선은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양국 정치인들 사이에 반일·혐한 의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인들까지 겹치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손 교수의 분석이다.
더 큰 악재도 존재한다. 그는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움직임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손 교수는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아주 가까이 왔다”며 “실제로 현금화가 이뤄진다면 한일 관계는 (하한가가 아니라) 파국으로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최악 국면에서 빠져나오려면 현 정부가 자산 현금화를 막기 위한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대로 간다면 한일 양국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며 “강제 징용·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을 한국 정부가 먼저 지급하는 이른바 ‘대위변제’에 나서는 등 행동에 나서야지 그냥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손 교수는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 역시 양국 관계 개선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 ‘문재인 정부는 믿을 수 없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며 “차기 총재로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이나 기시다 후미오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이 거론되지만 누가 총재가 돼도 현 상태에서 양국 관계 개선에 나서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에서 차기 정권(또는 인수위원회)이 들어선 후에야 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결국 현 정부는 파국이 일어나지 않도록 위기를 관리하고 다음 정부에 넘겨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한일을 바라보는 양국 미래 세대의 시각이다. 특히 2030 세대에서 일본에 대한 호감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손 교수는 “2030 세대의 경우 기성세대가 갖고 있는 반일 감정, 복수심,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굉장히 약하다”며 “이들이 기성세대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한일 관계 개선의 해법으로 손 교수는 ‘수레바퀴론’을 제시했다. 과거사 문제 해결과 협력이 수레바퀴처럼 동시에 이뤄져야지 한쪽을 멈춰 세우고 다른 한쪽만 움직여서는 갈등이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강제 징용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방역과 기후변화 등과 같은 공동 관심 분야에서 협력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것이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고 조언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