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접종으로 회복 국면에 들어서는 듯했던 세계경제가 에너지 대란이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기후위기를 이유로 각국이 석탄발전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발전을 확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날씨와 급격한 수요 증가 등으로 에너지 공급이 불안정해지고 있어서다. 여기에 지정학적 위기와 무역 갈등, 구인난 등 정치·사회적 요인까지 겹쳐 천연가스와 원유 가격이 더 오를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특히 에너지 대란이 제품 가격의 상승→소비 부진→경기 침체 등으로 연결돼 세계경제에 큰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中, 올림픽 앞두고 무리한 탈탄소…성장률 하향
28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본토 16개 성에서 전기배급제가 실시되고 있다. 지린성·헤이룽장성 등에서는 가정 정전이 잇따르고 있고 랴오닝성 선양에서는 신호등이 갑자기 작동을 멈춰 심각한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SCMP는 “보통 산업체에만 국한됐던 정전이 가정으로까지 확대됐다”고 전했다.
산업 분야 전력난은 심각하다. 이미 애플과 테슬라 협력 업체의 일부 공장이 멈춰 선 상태이고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에 대거 공장을 보유한 대만의 후공정 업체들이 설비 가동을 중단하면서 칩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 24일 랴오닝성의 한 금속 가공 업체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배기 장치가 멈춰 노동자 23명이 일산화탄소를 흡입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길림성의 한 생수 회사는 “예고 없는 전력 제한이 오는 2022년 3월까지 지속되고 정전은 일상이 되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골드만삭스는 이날 중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8.2%에서 7.8%로 하향 조정했다. 모건스탠리도 전력난으로 공장 감산이 장기화하면 4분기 중국 성장률이 1%포인트 낮아질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이런 전력난이 구조적이라는 데 있다. 호주산 석탄 수입이 금지된 상태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2060년 탄소 중립’ 선언으로 화력발전 사용도 어렵다. 일부 금융기관은 화력발전에 대한 자금 지원을 끊었다.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있는 점도 탈탄소 드라이브를 멈추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英, ‘기름 대란’이 의료 산업 위협
영국에서는 기름을 운송할 기사가 부족해 난리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로 영국 내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어려워져 화물 운송업에 인력난이 심해졌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주유소 30%가량이 재고가 바닥난 상태라고 밝혔다. 이미 영국 정부는 기름 운송에 군 투입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기름 대란’은 의료와 교육, 돌봄 노동 등 핵심 산업까지 위협하고 있다. 당장 차를 타고 출근할 기름조차 없어지면서 직역별로 전용 주유소를 지정해달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등장했다. 영국의학협회는 “의료진이 업무를 중단할 위험이 있다”며 “의료진이 휘발유와 디젤에 우선적으로 접근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영국홈케어협회 역시 “출근을 못 하는 직원들이 늘고 있다”며 “간병인을 기다리는 환자의 가족들도 출근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밝혔다.
유럽, 전력난에 전기료 급등
기후위기 대처를 위해 풍력발전을 늘렸던 유럽은 바람이 불지 않아 곤욕을 치르고 있다. 풍부한 해상풍력발전을 바탕으로 유럽 국가에 전력을 수출했던 아일랜드의 풍속이 급격히 약화된 것이다. 이에 유럽에서는 천연가스 수요가 급증했고 그 여파로 가격이 최근 1년 새 500% 폭등했다. 그 결과 전력 도매가격도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48%, 36% 올라 소비자의 부담이 커졌다.
지정학적 위기도 유럽의 에너지 대란을 심화하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천연가스 송유관 ‘노르트스트림-2’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줄이면서다. 미국은 7월 가스관 건설에 동의했지만 러시아의 압박이 계속되면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에너지부는 22일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 경색으로 타격을 입은 유럽 국가를 지원하겠다”며 “가격 조작 혐의를 받는 공급 국가(러시아)에 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
천연가스 대란은 다른 국가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은 “석탄 사용을 줄이는 중국과 가뭄으로 수력발전에 어려움을 겪는 브라질이 천연가스 수입량을 늘리고 있다”며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세계경제가 공급망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생산 비용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